어린 생명의 탄생과 성장, 인간존엄에 대하여

  • 등록 2023.07.22 20: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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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사의 자살사건을 바라보면 교육권의 강화와 합리적 학습권에 대한 반성과 성찰

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세훈 논설위원 | 대한민국은 이미 인구 절벽국가로서 이 지구상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국가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여 1명의 자녀를 갖지 못하는 작금의 통계수치를 보아도 지금의 아이들이 탄생해 성년이 되는 약 20년 전후인 2040년대에 대한민국의 경제활동인구는 급감하고, 현 사회교육체제의 큰 변화가 불가피 하다는 자명한 결론 앞에 도달한지 오래되었습니다.

 

국가도, 지방자치단체도 거액의 현금을 지원하며 출산을 유도하고 있지만 좀처럼 젊은이들의 출산율은 오르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제 경우,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이 아이가 성장하여 결혼하고, 영명하고 예쁜 첫 손녀를 1년전에 안겨주더니, 이 복중에 두번째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으니 며느리와 아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구약성서 창세기편에 보면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골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 빛이 좋았다고 천지창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탄생하는 모든 아이들은 이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사회의 빛이 되기까지 출산과 성장과정은 몹시 어려워만 보입니다. 우선 제 경우, 예비부모 모두가 국내외에서 최고의 학위과정을 마치었으니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상당한 고급인력에 해당하고, 둘 모두 전문적인 일을 하는 맞벌이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지원이 있다고는 하여도 아이들의 육아를 위한 경제력과 사회적 시설이용 역시 벅차 보입니다.

 

이들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없다면 주거문제와 아이 성장을 위한 지출과 미래 준비는 곧바로 현실이 되고, 맞벌이 부부로서 필수적인 유아(치)원의 CARE(돌봄)시스템이 없다면 장년세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애써 회피하고 있어 결혼비율 감소와 함께 출산율 저하의 문제는 자명한 사회현상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 손녀는 이제 태어난 지 1년이되어 걸음마를 막 하기 시작하였고, 대기업에서 제공한 유아(치)원에서 하루일과중 짧은 시간동안 아이가 적응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유아(치)원 체류시간을 1시간에서 시작하여 체류시간을 점점 3시간, 4시간으로 늘려가며, 다른 아이들과 접촉하면서 관심분야를 넓혀가며 생활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족의 도움이 없이는 독립적인 성장은 불가한 상황입니다.

 

한 명 아이의 경우에도 그런데 둘, 셋의 경우에는 참으로 주변의 희생과 사랑 없이는 지탱하기가 어렵고, 아이들의 돌봄 시스템의 중요성 역시 더욱 강조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돌봄 시스템이 잘 완비되어 있다고 하여도,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긴다면 이 또한 난감한 일입니다. 각 지자체의 장이나 국가를 통괄하는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어린이 돌봄 시스템안에 전문의료진을 두어 원내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해결되는 시스템이 되도록 정책적 제안을 하여 봅니다.

 

작금의 소아응급과가 수요부족으로 폐지되고 있음을 볼 때, 군 의무관제도들을 통하여 개선의 여지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아원의 혜택이 없는 곳도 전국에 산재해 있으므로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나, 이들 젊은 부부들의 요구를 소화할 방법과 다양한 돌봄 시스템을 만들어 주는 제도적, 법적장치의 정비 역시 필요해 보입니다.

 

현 대통령 내외가 아이출산과 성장과정에서 직접적인 경험이 없다는 것이 이러한 제도적 마련의 동기나 정책입안을 추진하기에 관심이 부족해 보일 수는 있으나, 모르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이제 정쟁과 진영논리, 그리고 전임정부와 현 정부의 대립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대승적인 관점에서 출산과 유아 성장과정 전반에 관한 논의과정을 통하여 바른 정책을 입안해 보기를 기원해 보게 됩니다.

 

최근, 초등학교 교사가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직 자살의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안타깝고 우리 교육의 장이 엄중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미 교육현장은 직업인으로서의 선생님들은 흔히들 계시지만, 과거 준엄하고, 사표가 될만한 스승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한탄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이셨던 하현숙 선생님이 특별히 기억에 남고, 대학과 대학원과정에서 만난 학헌 변형윤, 이산 조기준, 향사 리영희 선생님 등을 개인적인 사표로 모시고 있습니다.

 

특히나, 초등학교 시절의 하현숙 선생님은 제가 3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부친을 사고로 잃었을 때, 그 현장에서 함께 해 주셨고, 따뜻한 마음으로 늘 위로해 주셨으며, 절망의 순간에 용기와 희망을 갖도록 해 주신 분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이제야 전해봅니다.

 

『논어』「위정(爲政)」편에 나오는 말로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은 ‘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진정한 스승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고어중 하나입니다. 아이와의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선생님과 제자와의 사이, 좀 더 의미를 확장하면 인간관계를 생각해보는 소중한 단초가 될 수 있는 말입니다.

 

‘스승’에 대한 존칭은 우리는 대개 ‘선생님’이라 칭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선생님을 만나왔습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그 많았던 선생님들과 대학과 대학원에서 가르치는 분들을 ‘교수(敎授)’라 칭하지만, 그 역시 선생님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났던 그 많은 선생님 중에서 ‘참 스승’이라고 할 만한 분은 얼마나 있을까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한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을 모두 ‘스승’으로 생각하진 않습니다.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이거나, 그 직업이 꼭 좋아서 선택했다기 보다는 안정적인 직업이기 때문에 택한 것으로 보이는 그런 분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드물기는 하지만 ‘선생’이라는 이름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분과 저런 사람이 남을 가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 싶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좋은 선생님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대체로 제 경우에는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공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스승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였을까요?

 

『논어』「위정(爲政)」편에 보면 ‘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라는 말이 나옵니다.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 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온고지신 (溫故知新)’입니다. 18세기의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법고창신 (法古創新 옛 것을 본받아 새 것을 창조한다)이라 말합니다. 『논어』에서 공자가 이 말을 한 것은 ‘스승’에 대해 이야기하기 하기 위해서입니다.

 

공자의 이 말을 주자(朱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고(故)는 예전에 들은 것이요, 신(新)은 지금에 새로 터득한 것이다. 배움에 있어 예전에 들은 것을 때때로 익히고 항상 새로 터득함이 있으면, 배운 것이 나에게 있어서 그 응용이 끝이 없다. 그러므로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암기나 하고 묻기나 하는 학문이라면, 마음에 터득함이 없어서 아는 것이 한계가 있다.” 주자의 이 해설만으로도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남을 가르치는 일을 하려면 어떤 자세로 학문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충분합니다.

 

‘고(故)’의 의미를 예전에 들은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옛날부터 지금까지 쌓여온 지식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신(新)’은 이제 새로 터득한 것이라 했으니, 이는 기존의 지식체계를 바탕으로 현재의 삶에 적용해 내 나름대로 깨달은 지혜, 또는 ‘신지식’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쌓여온 지식들을 습득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일단은 어느 정도의 암기도 필요하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질문도 해서 분명하게 이해하고 넘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늘 해왔던 공부방식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만 해서는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공부를 주자는 ‘기문(記問)’의 공부라 비판하였고, 암기나 하고 묻기나 하는 학문이라면 터득함이 없어서 앎에 한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논어』「위정」편 15장에 보면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말이 나옵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남는 것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입니다. 역시나 암기하고 묻기만 하는 공부에 대한 경계가 담겨 있습니다.

 

수동적으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지식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나름대로 그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거쳐 철저히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내 속에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이해가 수반되지 않은 암기 위주의 지식은 내 것이 아닙니다. 교과서 속의 지식일 뿐입니다.

 

반대로 혼자 생각은 많이 하는데 배우지 않는다면 위태롭게 됩니다. 자기 사고 안에 스스로를 가두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이미 인정한 객관적 사실, 체계적인 지식들을 충분히 습득해야 스스로의 아집과 편견에 빠지지 않게 되고 비로서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암기하고 묻는 공부를 충분히 하고 그것을 내 나름의 ‘생각의 정화’를 거쳐 내 안에 담아둔다면, 그 지식은 진짜 내 것이 됐다고 할 수 있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응용도 끝없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사자격증을 땄다고 해서, 교육대학원을 나와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가 말한 ‘온고지신’은 스승이 갖춰야 하는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덕목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논어』「술이(述而)」편에 나오는 ‘자왈, 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삼인행이면 필유아사’의 원문입니다.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그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 선한 자를 택하여 그를 따르고, 그 불 선한 자는 그것을 고치라는 의미인데 이 말 역시 ‘스승’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해줍니다.

 

‘스승’이라고 하면 우리가 특별히 고명하신 어떤 분을 찾아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을 드리고, 그 밑에서 도제식으로 학문을 전수받는 방식을 떠올리고는 합니다. 요즈음도 석박사과정은 저명한 은사님을 찾아 학위과정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건이 되지 않거나, 형편이 되지 않아 스승을 모실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까요? 사실, 스승은 내가 꼭 일부러 찾아가지 않아도 내 주변에 늘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글입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간다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이고 즉,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면 된다는 말이며, 나보다 못하다면 반면교사(反面敎師),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바로잡으면 된다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내 주변의 그 누구라도 내 인격을 완성시키는 교과서가 될 수 있으며, 선생님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할 점은, 공자가 말한 ‘학문’이란 국어, 영어, 수학 같은 그런 공부가 아니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바탕이 되는 공부, 즉, 인격의 완성을 이루고 사람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공부라는 점입니다.

 

지금은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先生)’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 뜻을 따져 보면 말 그대로 ‘먼저 태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옛 문헌에서는 ‘선배(先輩)’와 비슷한 말로 쓰였습니다. 반대말은 ‘후생(後生)’이니 곧 ‘나중에 태어난 사람’이란 뜻이고, 이는 ‘후배(後輩)’의 다른 말입니다.

 

그렇다면, 선생은 학생에게 ‘인생의 선배’쯤 되는 존재입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나보다 나중에 태어난 사람들, 젊은 후학(後學)들을 두려워할 만하다는 말입니다.

 

배움의 시작은 먼저 했을지라도 누가 진리의 심연에 먼저 다가서는가 하는 것은 선후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나보다 늦게 태어나 공부를 시작했더라도 얼마든지 나를 추월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순자(荀子)』에 나오는 전체 문장은 ‘청출어람이청어람(靑出於藍而靑於藍)’인데, ‘푸른 빛깔이 쪽(파란색 염료를 만드는 식물 이름)에서 나왔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입니다. 제자가 스승에게서 나왔지만 스승보다 더 뛰어날 때 하는 말입니다.

 

스승의 수준만큼 오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스승이 될 수도 있고,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분발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존엄하고, 존귀한 스승이 어느 초등학교에서 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자살의 원인은 정확하지 않지만 학부모의 폭언과 압력이 있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옛 말에 ‘스승의 그림자는 감히 밟지 않는다’ 했으니,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학부모의 이기적 행동은 자못 사회악이요, 교육현장에서는 어떤 경우라도 순기능 영역은 아니라는 판단을 해봅니다.

 

얼마나 대단한 부모이기에 개인적으로 학교 선생에게 전화를 하여, 하소연을 넘어 폭언과 압력을 일삼는다면 우리 풀뿌리 교육 현장은 교육권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자멸할 것이 자명합니다.

 

자기 자식이 귀하면 다른 사람의 자녀들도 귀하고, 자기 자식에게 옛 것과 새 것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귀한 존재임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이미 대한민국의 학부모들의 평균학력은 수도권의 경우, 대졸이상 부모가 태반을 훨씬 넘었을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바로 돈이 최고인 경제력 중심 구조하의 무한경쟁사회에서 살다 보니, 자기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는 더 하대하고, 학부모로서 선생님들보다 오히려 학력이나 경제력 우위구조 하에서 상대적 약자에게 강해지는 모순적 삶을 지향하는 학부모의 탄생을 여실히 보게 된 것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해봅니다.

 

특히나, 확인되지 않은 사항을 SNS를 통하여 작성하여 배포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공론화하는 경우, 학부모 모임을 통하여 학교장 또는 해당선생님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들은 정당한 사안인 경우를 제외하고 이미 범죄수준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교육부와 교육청이 있다고 하여도, 학교 일선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학교장에게 전권이 부여되고 선생님들에게도 재량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학교장이 학부모 입장에서 사건을 덮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다고 하니, 앞으로는 해당 교육기관에서 합리적 판단을 통하여 학생과 선생님을 스스로 보호하는 강력한 방패역할을 할 수 있는 실행 가능한 제도적 개선도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스승의 날은 우리 역사의 큰 스승인 세종대왕 탄신일에 맞추어 제정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더욱 밝은 등불이 될 만한 그러한 존재를 기다리는 바램 들이 들어있다고 저 스스로 생각해 봅니다.

 

일찍이 중국 북송(北宋)의 거유(巨儒) 사마광(司馬光)은 ‘경사(經師)는 만나기 쉬워도 인사(人師)는 만나기 힘들다(經師易遇 人師難逢).’라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사마광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서로 꼽히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하였는데, 이 구절은 바로 고전(古典)이 된 이 책에 실려 있습니다.

 

‘경사’는 경서(經書)를 가르치는 교사를 말하고, ‘인사’는 사람 되도록 가르치는 스승을 말하니, 요즘 말로 하면 강의를 잘하는 직업적인 선생은 많으나, 인격적 감화를 주는 참 스승은 드물다는 뜻으로 다가옵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가장 큰 병 중에 하나는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人之患在好爲人師’라는 맹자(孟子)의 지적대로 제대로 된 사도(師道)를 갖추지도 않은 채 남의 스승 되기를 도모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은 선현들이 스승의 조건을 내건 바 있습니다만, 가장 공통적인 것은 먼저 스스로 자신을 닦아야 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교사가 갖추어야 할 권위로 첫째는 지식적 학문적 권위, 둘째는 정신적 인격적 권위가 일반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이유일 겁니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스승의 조건으로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고 설파한 바가 있습니다. ‘옛 것을 익힌다’는 말 속에는 옛사람들의 잘잘못을 깊이 익혀 자신을 가다듬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즉 이 말 속에는 학문에 대한 깊은 탐구와 함께 인간 이해에 대한 깊은 사랑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자는 자신이 내세운 스승의 조건을 힘써 실천하였습니다. 우선 공자의 학문 태도가 깃든 고사성어 ‘위편삼절(韋編三絶)’을 통해 책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꾸준히 독서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 독서에 머무르지 않고 깊이 생각하고 성찰하였습니다. ‘배우되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엉성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하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든지,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는 어록(語錄)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학문은 훌륭한 스승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만족조건은 아닙니다. 사랑이 필요합니다. 인격적 감화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인(仁)과 엄(嚴)을 균형 있게 갖추어, 위엄은 있으되 무섭지는 않아야 합니다. 순자(荀子)가 설파한 ‘청출어람(靑出於藍)’의 태도는 사랑의 발로입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상적인 교육 태도로 가르치면서 함께 배운다는 ‘교학상장(敎學相長)’과 스승과 제자는 같은 길을 가는 친구라는 입장의 ‘사제동도(師弟同道)’와도 통한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조건은 모두 먼저 자신을 닦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공자의 모습을 표현한 ‘논어(論語)’ 향당편(鄕黨篇)에는 ‘화가 나도 남에게 옮기지 않았고, 한번 한 실수를 결코 두 번 저지르지 않았다(不遷怒 不貳過)’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자제하고 가꾸어 왔음이 느껴집니다. 이처럼 선현들은 먼저 자신을 닦는데 애써왔습니다.

 

그리하여 신체는 부모에 의해 탄생되지만 정신은 스승에 의해 길러진다는 소명감을 가지고 제자들을 대하였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오늘날 학부모나 선생님에게도 당연히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학생이든, 선생이든, 학부모이든 스스로 자신을 먼저 닦고, 상대방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지식 전달자와 지식 수혜자로 구분하여 볼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지향하는 과거의 진리와 새로운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하고,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무너져 내리는 교권 앞에 어느 누가 참 스승이 되고자 염두를 낼 지 의문이 듭니다.

 

자녀 양육의 문제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1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학교의 교육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의 현장이자, 전인교육의 현장입니다. 초등교육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가르침을 통하여 우수한 인재의 양태가 이 곳에서부터 배아 될 수 있도록 기본자질을 익히는 곳입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는 곳도 아닌데 학부모의 의도적이고 불순한 간섭은 교육의 질을 저하시키고, 교육권을 침해하게 되고, 사회적 긴장을 고조시키며, 학생과 선생의 긴장이 점차 확대되어 적대적 관계가 됩니다.

 

학부모도,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스스로를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각자가 거주하는 공간과 생활수준, 교육수준이 다 다릅니다. 또한 각자가 스스로 가꾸어 온 인격수준이나 사회적 의식수준도 다릅니다. 지금 많은 이들이 안타까운 현실 앞에 놓여 있습니다. 스스로 잘잘못을 살펴보고, 내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번 수해현장에서도 정부의 책임 있는 분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국민을 향한 사과의 뜻을 밝힌 바 없습니다.

 

오늘의 어른들은 지난날 지식만 습득했기에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과오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나로부터 발생한 일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다른 정책에 의하여 발생한 사안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피곤합니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모릅니다. 이는 정부 불신과 정책불신으로 이어져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게 됩니다.

 

국민들은 이미 피폐한 대한민국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교육현장도 불신하고, 학생의 교육전달자인 선생님들도 불신하고 있습니다. 믿고 따를 것은 자신의 자녀의 말 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자녀만을 신뢰하고 있음입니다.

 

그러나, 자녀는 아직 미성숙한 존재입니다. 서로엔 대한 불신은 상호 대립하도록 하며, 이러한 불신은 학교현장부터 사회곳곳의 현장에서 오늘도 대립합니다. 이제 면밀한 조사를 통하여 누구의 잘못으로 선생님이 자살에 이르게 되었는지 명명백백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제도적 보완을 통하여 무너져 내리는 교권을 재확립하고, 학생들의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학습권리 역시 존중될 수 있도록 보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사회가 서로 용서와 사랑이 함께 할 수 있는 학교가 될 수 있도록 전인적이고 인문학적인 교육이 진행되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교사 혼자 감내하고, 스스로  결단하여 자살에 이르도록 방조한 우리 모두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협력한 방조범입니다.

 

스스로 짧은 생을 마감하신 선생님의 영전에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가 머물기를 기도 드리면서 부모님께도 마음으로부터 깊은 애도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세훈 기자 moderato3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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