流水七德(유수칠덕) .... 흐르는 것은 서로 다투지 않는다

  • 등록 2023.12.26 08: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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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세훈 논설위원 | 세월이 흘러 벌써 60을 훌쩍 넘었다. 2023년이 이제 곧 2024년이 된다. 일월이 십이월이 되었듯이, 해(歲)와 달(月)이 바뀌는 것을 보고 우리는 세월(歲月)이 흐른다고 한다. 흐르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시간도 흐르고, 바람도 흐르고, 강물도 흐른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것도,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다시 20대를 살 수 없는 것도, 강물과 시간의 흐름 때문이다. 흐르는 것은 돌이킬 수 없다.

 

 

연말연시의 풍경 역시 예전과 사뭇 다르다.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앞을 가름하기 어려운 암울한 시대적 상황으로 다가오는 2024년이 버겁지만 이내 맞을 수밖에 없기에 폭풍전야처럼 더더욱 조용하다. 서민경제를 가늠하는 거리의 모습 역시 활기가 없고 조용하기만 하다. 연말이 되면 삼삼오오 모여서 한 해의 무탈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던 송년모임도 확 줄었다.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져 긍정의 요인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으나, 처연한 미래를 숨 죽여 이야기 하는 부부의 걱정은 더 커지기만 하리라.

 

윤석열정부 들어 부자감세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다 보니 이미 정부의 곳간은 텅 비어 있고, 한국은행으로부터 차입에 의존하는 재정적자 기조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감세혜택을 본 기업은 투자나 소비를 늘려 산업경제 활성화에 기여해야 하지만, 그 마저도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다. 결과적으로 윤석열정부 집권, 1년8개월만에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구조는 더욱 심화되기만 하였다.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틈바구니에서 금융기관은 담보위주의 자금운용과 중저신용자에 대한 고금리 정책으로 땀 흘리지 않고도 제도적 장치에 의한 서민 수탈을 이루어 가고 있다. 다만, 경제구조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만큼, 건설경기의 하강으로 건설회사에 대출한 대규모 PF 부실이 예상되고, 제조기업의 생산력 역시 감소하여 위험이 증가하는 바, 이 경우 금융기관 역시 국민의 혈세에 의존하는 방식이 아닌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와 지혜가 필요하리라 본다. 우리나라를 이끄는 대표적인 기업군이 반도체 기업인데, 삼성전자 등 과거 반도체 회사들의 연말 성과급이 1,000%를 넘은 적도 있었는데 올해에는 “성과급 ZERO”라니 격세지감을 느끼고, 엄중한 국가경제위기에 도달하였음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모두 이야기 한다. 삼라만상 흐르는 것은 모두 생명이 있고, 흘러야만 생명은 살아 있을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다. 강물, 눈물, 시간, 밤 하늘의 달과 별까지도 흐른다. 자연이나 어둠과 침묵도, 빗물도, 냇물도, 바닷물도,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세월도, 시간도 “흐른다”라는 세 글자면 모두 통한다. 물과 피는 흘러야 썩지 않고, 냇물과 강물은 흘러야 비로서 정화가 되고, 바다에 이른다. 바다에 이르러서도 들고 나가기를 쉼 없이 반복해야 비로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구름과 바람은 흘러가야 비와 눈을 멈추어 햇살을 우리에게 선물하여 자연의 신묘함으로 온갖 과일과 먹거리를 남겨준다. 바로 생명을 유지하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이 가능해진다.

 

번잡한 생각과 마음도 시간이 흘러야 고요하고, 우리가 잊지 못하는 큰 아픔도 시간이 흘러야 잊을 수 있다. 세월이 흐르는 것은 아쉽지만, 새로운 생명은 흘러야만 다시 채울 수 있다. 흐르는 강물은 외로울 틈이 없다. 강물은 이른 봄부터 늦은 겨울까지 한결같이 흐르지만, 더 빨리 흐르라고 등을 떠밀지 언정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않으며 드넓은 바다로 가기 위해 강줄기가 아닌 강물로 굽이지어 흐른다. 경제 역시 잘 흘러야 한다. 유동성의 경색은 바로 사회적 폐해를 가져오기에 부족한 곳이 있는지 면밀히 살려 자금경색이 나타나기 전 사전적, 선도적인 금융지원 체계와 함께 면밀한 관리가 필요하다. 금융기관의 경우, 영업이익이 많이 발생했다고 임직원이 모두 다 나눠 쓰라는 개인 곳간이 아니다. 금융기관의 사회적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한번 잘 살필 일이다.

 

춘추시대 노자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최상의 방법으로 물처럼 살고, 흐르는 물에서 진리를 배워야 하며, 인간수양의 근본을 “물이 가진 일곱가지 덕목”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일곱가지 덕목 중 첫째는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그 공을 서로 다투지 않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찾아서 흐르는 “겸손”이다. 둘째로는 다투지 않고 흐르다가 막히면 돌아 갈 줄 아는 “지혜”이며, 셋째로는 무엇이든 다 받아주는 “포용력”이다. 넷째로는 담기는 그릇을 가리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순응하는 “융통성”이며, 다섯째로는 떨어지는 낙수로 바위를 뚫는 “인내”이며, 여섯째로는 장엄한 폭포에서 떨어져 작은 물방울로 부서지는 아픔을 참아내는 “용기”이며, 일곱째로는 작은 물줄기가 부서지고 깨지며 강(江)을 이루고, 다시 긴 여정 끝에 비로서 바다를 이루는 것을 “대의(大意)”라고 하였다.

 

 

강물 위에 떠 있는 나뭇잎을 보는 것이 강물의 흐름을 짐작하는 방법으로는 으뜸이다. 잠깐 동안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살펴보니, 왼쪽에 있던 나뭇잎이 오른쪽으로 움직였다면, 강물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뜻이다. 강물이 흐르는 속도는 v=x/t로 적혀서 나뭇잎이 움직인 공간상 위치의 변화량(x)과 시간(t)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강물의 흐름은 둘의 비율이자 경쟁이다. 고속의 셔터 속도로 찰칵 사진 찍어 시간을 멈추면 흐름이 없고, 공간상의 한 점에 시선을 고정해 바라보면, 방금 그곳에 있었던 물체는 잠시 뒤 자리를 옮겨 시야에서 사라진다. 모든 흐름에는 공간과 시간이 서로 얽혀 있다. 공간과 시간의 경쟁이 흐름이다.

 

시간도 흐른다. 나뭇잎으로 강물의 속도 v=x/t를 재는 방법을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도 눈 딱 감고 적용해보면,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t/t=1이 된다. 시간의 속도가 1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시간에 대한 시간의 비율로 빠르기를 재는 것이어서 시간의 흐름을 이 방식으로 얘기하는 게 어불성설이라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같은 것을 서로 비교해 봐도, 새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시간 자체가 흐르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따라서, 우리 밖의 무언가의 변화가 일정한 방향성이 있을 때,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고 말할 뿐이다. 1월이 12월이 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눈이 내리더니 입춘이 되고, 봄이 오더니, 우수를 지나고, 이내 하지가 지나면서 낮이 조금씩 짧아지는 것을 보거나, 장마철이 시작되고 끝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달력을 한 장 넘기면서, 우리는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시간도 강물처럼 흐르지만, 둘은 서로 다르게 흐른다.

 

강물은 도대체 왜 흐르는 걸까? 산에서 바다로는 흐르지만, 거꾸로 바다에서 산으로 흐르는 강물은 없다. 물리학에서는 강물이 흐르는 이유를 중력에 관련된 에너지를 가지고 설명한다. 강물이 산에서 바다로 흐르고, 동전이 아래로 떨어지는 이유는, 낮은 곳에 있을수록 에너지가 낮기 때문이다. 모든 물체는 더 낮은 에너지를 가진 상태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공간 안의 모든 흐름은 낮은 곳을 향한다.

 

"냇물아 흘러 흘러서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서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는 동요 '시냇물'의 가사다. ‘시냇물’은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다.

 

신영복 선생은 1941년 밀양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하다가 1968년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소위 '통혁당'사건으로 구속되고, 사형선고를 거쳐 최종적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는다. 최고 3년형이 상식적 판단이었지만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 후 20년 2개월을 복역하다가 1988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되어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한다.

 

출소 후 분단사회에서 '주홍글씨'를 달고 살게 되었고, 사면과 복권되는 과정에서 극심한 소외와 함께 사랑의 동행과 연대를 경험하기도 한다. 75세에 생을 마감한 고인의 죽음의 원인은 햇빛이 귀한 지역에서 발생한다는 희귀한 암인 '흑색 종암'이었다. 무기징역을 받고 추운 독방에 갇혀서 고인은 "나는 왜 자살하지 않나"를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북서쪽으로 난 창문으로 하루 두 시간쯤 들어오는 신문지 크기 정도의 햇빛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을 때 느낀 행복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결코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했다고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살하면 매우 슬퍼할 사람들을 생각하며 “존재”라는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다고 한다.

 

자그마한 햇살에 의존하여 20년 2개월 만에 출소하여 온 천지에서 부서져 내리는 햇살 아래 섰을 때 느꼈을 망연자실을 아프게 공감하면서 오히려 감옥의 '동굴'이 수인에게 주는 그 허망함을 붙드시고 고인의 삶과 동행하신 '수난 당하시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은총으로 다가온 삶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지혜자의 성찰을 함께 지녔던 신영복 선생은 감옥에서 직면하는 섬뜩한 죽음의 그림자와 억울함과 분노와 좌절의 '바위'들을 끝내 물처럼 돌아 나며 세월의 저 낮은 곳으로 흘려 보냈으리라 생각해 본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투옥된 채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며 써 내려간 옥중서신은 바울 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입장'을 같이하는 동지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함께 그의 애정 어린 당부들이 마지막 신영복의 '강의'와 '담론에 담겨있다. 감옥생활의 고독과 곤란을 넘어 마지막과도 같은 '겨울'을 담담히 맞을 준비를 갖춘 곳에는 '더불어 숲'의 의지가 담겨있다. 바울이 옥중에서 그리움을 통해 만나는 동지들과 연대하며 배신의 상처가 주는 아픔을 넘어 복음의 진보를 위해 던지는 사심 없는 고언들 속에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씨앗들이 담겨 있다.

 

시인 신동엽은 부여읍 동남리에서 태어났다. 대문 처마에 붙은 ‘시인 신동엽 생가’라는 한글 현판이 근사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곳은 시인의 ‘고향 집’이다. ‘생가터’(동남리 294번지)는 지금 그저 빈터로 남아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이사를 왔다고 한다. 신동엽은 이곳에서 자라고 나중에 인병선과 신혼살림도 이곳에서 시작했다. 1985년 이 집을 복원한 후, 한동안 그의 부친이 홀로 집을 지키며 방문객을 직접 맞이했다고 한다. 인병선의 시 ‘생가’가 현판처럼 붙어있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라는 인병선의 시를 정갈하게 쓴 현판은 신영복 선생의 글씨다.

 

 

이미 한참이나 우리 곁에 들어선 겨울이니, 엊그제 지난 동짓날로 인해 다시 낮은 점점 더 길어질 테이고, 신영복 시인이 노래하던 희망찬 봄을 우리 모두 가슴속에 저미며 미리 기다려 볼 만하다.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 속에서 움트리라”.

 

새로운 해와 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기대와 자세는 너그러운 봄이다.

 

신동엽 선생은 그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경우, 김지하의 <오적(五賊)>과 함께 1970, 1980년대 유신과 군사정권 아래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며 외치던 격문이었고, 시어가 있다. 특히 마지막 행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는 5공화국 군사정권을 상징하는 총칼을 ‘쇠붙이’로 표현한 것으로 읽혀 선명한 저항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군부통치 하에서 살고 있지는 않지만 군부통치 하에서 없는 죄도 만들어 씌우던 정치인의 하수인으로써 그동안 호의호식하면서 그들과 함께 살아온 자랑스런 엘리트 집단인 검사의 나라에 살고 있다. 이제 수십년 세월이 지났으니, 잊혀 질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지금도 반복되는 과잉수사와 무차별 기소로 국민들을 억압하는 주체가 바로 검사집단인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대다수의 검사는 이러하지 아니하다.

 

국가 경제기구의 주요보직과 방송, 언론, 주요단체, 공공기관의 장을 검사들이 장악하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리라 본다. 30%선에 오르락 거리는 대통령의 허약한 지지율과 집권여당의 대통령실 바라보기, 누적된 정치적 편향과 이념들, 공허한 경제정책 남발과 나락으로만 떨어져 가는 현재 경제상황을 보면서, 국민의 안위를 위한 목적이 아닌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필요한 자신의 호위집단으로 이들을 사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바로 ‘껍데기’이다. 이 껍데기는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국민의 안위가 아닌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였다면 스스로 ‘껍데기”는 사라져 가길 요구한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이세훈 논설위원 / 경제학 박사

이세훈 기자 moderato3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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