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禪一味, 茶道一味의 뿌리는 無所有 (2)

  • 등록 2024.06.04 08:5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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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세훈 논설위원 | (1편에 이어 계속)

 

중국 알리바바의 창시자 마윈은 보이차 전도사다. 보이차를 좋아해서 혼자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보이차 보급에 오랜 동안 공을 들였다. 그는 여러 차들 중에서 특히 보이차를 좋아하는 데, 그 이유는 보이차의 성질이 IT업계의 속성과 반대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윈은 중국 IT업계의 기념비적 인물이다. 알리바바를 창업하여 중국인의 소비 패턴을 전자상거래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알리페이, 타오바오 등 여러 영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IT업계는 정신적 압박이 큰 분야이다. 마윈 같은 세계적 초강자라도 과학기술의 최첨단에서 조금만 주춤하다 보면 바로 신기술에 밀려난다는 생각에 늘 긴장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IT뿐만이 아니다, 현대사회는 무한경쟁의 사회로 업종을 불문하고, 전 세계는 경쟁하고 있다,

 

경쟁에서 살아 남으면 거대한 부를 움켜지게 되고, 젊은 나이에 상상을 초월한 돈의 주인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성공하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은 사는 것은 아니다. 한잔의 그윽한 차를 바라보고, 음미하듯 소유물질 역시 그윽한 눈으로 바라봐야 하며 우리사회에서 또는 미래사회를 위하여 진정한 쓰임새를 찾는 무소유의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성이 시간의 첨단을 달려가면 감성은 더 아날로그 적인 자연에 일부라도 머물게 해 주어야 생명의 균형이 맞춰진다. 도시 한복판에서, 사무실 책상에서 바로 접할 수 있는 자연의 정수가 바로 차이다. ‘차(茶)’라는 글자를 들여다보면 ‘풀’과 ‘나무’ 사이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 차를 마시는 순간 차를 마시는 사람은 대자연의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차는 대자연의 선물이요, 신선의 이슬이다.

 

 

마윈과 리렌지(이연걸)는 아마도 스타벅스에 버금가는 보이차 비즈니스 제국을 창업하고 싶었던 것 같다. 리샤오롱(이소룡)의 뒤를 이은 쿵푸 스타 리렌지에의 이미지에 마윈의 창조력을 결합하여 타이지젠(TaijiZen, 태극권+젠)이라는 회사를 만들고 보이차를 출시했다. 당시는 중국이 세계 각국에 공자학원을 설립하고 중국 중심주의의 확산에 관심을 기울이던 때였다. 타이지젠의 창업은 중국 공산당의 행보와도 맞았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지 타이지젠은 성공하지 못했다.

 

인간의 세계야 어찌 돌아가든 차나무는 묵묵히 한 자리에서 다가오고 멀어져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서 더 반가워하지도 않고 좌절한 사람이라고 해서 더 얕잡아보지도 않는다. ‘하늘은 무심하다’는 말처럼 차나무는 무심하다. 그저 차나무는 찻잎을 피워 공평하게 나누어 준다. 윈난성의 천연원시림 차산에는 수 백 년을 살아온 차나무들이 있다. 농약은 물론 사람의 발길도 거의 닿지 않는 깊은 산 속에서 수 백 년을 살아온 차나무를 고차수라 하고, 그 고차수 찻잎으로 만든 보이차를 고수차(古樹茶)라고 한다. 수 백 살의 차나무가 무심히 내어주는 한 잔의 차, 그 무심한 차 한 잔에 생각을 내려놓고 마음을 쉬어 가는 것이 진정한 차인의 모습이다.

 

고차수로 정성껏 만든 보이차는 한 해 한 해마다 정말 맛있어진다. 일 년이 지나면 달아진 향기만큼 십 년 후에는, 또 이십 년 후에는 어떻게 변해갈까 기대하면서 바라보게 되는데, 보이차는 우리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차다.

 

고차수로 만든 보이차는 햇차보다 오래 묵힐수록 값어치가 올라간다. 그래서 ‘마시는 골동품’이라고 하기도 하고, 오래 묵을수록 더욱 향기롭고 맛있어진다고 해서 ‘월진월향’이라고도 한다. 할아버지가 사서 손자가 마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이차는 20~30년이 지났을 때 차의 맛이 최고조에 달한다.

 

고차수 숲 전경(애뢰산 천가채)

 

아무리 좋은 차라도 너무 값비싼 차는 그 절대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수천만원, 수 억원을 호가하는 차를 찾는 차인들이 많아질 때, 한 모금 차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차의 맛을 잘 표현하는 말에 다선일미(茶禪一味)가 있다. 차와 참선은 한 가지 맛이라는 뜻이다. 선(禪)은 사려수(思慮修)이니 사고와 명상을 닦는다는 말인데, 명상과 사려가 아무리 깊고 오묘할지라도 닦지 않으면 마른 지혜에 불과하여 실제 소용이 없다.

 

선(禪)은 언어와 논리가 끊어진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오로지 체험이 따라야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내관(內觀)으로 자성(自性)을 직관(直觀)하여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하여 들어오고 나가는 외계의 작용을 반조(返照)함으로써 마침내 확철대오(廓徹大悟)에 이른다는 것이다.

 

선(禪)의 체(體)는 대오정각(大悟正覺)이요, 상(相)은 정혜쌍수(定慧雙修)이며, 용(用)은 팔만사천(八萬四天) 법문(法門)으로 육도중생(六道衆生)을 구경성불(究竟成佛)하게 함이다. 이와 같은 것이 선(禪)이라 하면 차 또한 선(禪)과 같다는 말이 바로 다선일미(茶禪一味)로 여기에서 차의 미(味)인 용(用)을 더 말하자면, 차를 마시는 사람마다 각기 깊고 얕음이 달라서 어떤 이는 큰 강물에 발만 적시고 가는 사람도 있고, 온몸을 다 젖게 하고도 남는 사람이 있다.

 

차는 많이 마셔보고 많이 만들어봐야 그 차의 진미(眞味)를 알 수 있다지만, 수행을 아무리 오래 하고 별스럽게 했더라도 대오(大悟)하지 않고는 선(禪)을 말할 수 없고, 차를 아무리 오래 만들고 마셨다 하더라도 완벽한 차를 만들어보지 않고는 차를 말로 해서는 안 된다. 완벽한 차란 사실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와 선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 중국 송나라에 조주(778~897 趙洲)라는 선승이 있어 ‘끽다거(喫茶去)’라는 화두(話頭)를 냈다. 지나가는 스님들을 대할 때마다 전에 와본 일이 있다는 스님에게도 차를 한 잔 주고, 와본 일이 없다는 스님에게도 차를 한 잔 주니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래 스님이 물었다. “왜 왔던 이에게나 오지 않았던 이 모두에게 똑같이 차를 한 잔씩 주십니까?” 그러자 조주 스님은 그렇게 묻는 아랫 스님에게도 차를 한 잔 주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똑같이 차를 준 조주 스님의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조주 스님이 차를 준 것은 도(道, 즉 우주의 원리를 차, 또는 차를 주는 행위로써 표현함)를 준 것인데 도 닦는 스님이 도를 받고서도 도인 줄을 알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조주 스님이 차 마시고 가라 할 때 도인 줄 아는 사람은 분명 즉시 도를 내보여야 했다. 석가모니가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였을 때는 꽃을 든 행위의 진의를 파악하고 그 뜻을 내보인 가섭의 미소가 있었지만, 조주 스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차만 마시고 갔을 뿐이다.

 

그러나, 조주 스님은 이 ‘끽다거(喫茶去)’라는 화두를 통해 차의 체(體)인 도(道)에서 용(用)인 미(味)를 잘 썼고 또 차와 선(禪)은 불가분의 일미(一味)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시절, 백련사의 주지인 혜장스님에게 차를 얻기 위해 보낸 편지인 ‘걸명소(乞茗疏)’의 일부다. 당대의 최고학자인 다산의 명성과 무게에 걸맞지 않게 혜장스님에게 사정하는 모양새가 우리네 입꼬리를 살며시 들어올리게 하는 글이다.

 

“나는 요즘 다(茶)만 탐식하는 사람이 되어 겸하여 약으로 마신답니다. 산에 나무도 하러 가지 못할 병중이지만, 그래도 차만은 얻어 마시고자 하는 뜻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고해(苦海)를 건너는 데는 보시가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름난 산의 고액(苦液)이며, 풀 중의 영약으로 으뜸인 차가 보시로는 제일이 아닐런지요? 목마르게 내 바라는 뜻을 헤아려 달빛과 같은 은혜를 아끼지 말기 바랍니다.”

 

더 재미난 편지도 있다. 추사 김정희가 평생지기인 초의선사에게 보낸 글이다.

 

“편지를 해도 답할 생각을 않는 건 산중이 바쁜 탓만이 아니고 세속과 교섭할 뜻이 없다고 보여 지네만, 이 백수의 늙은이가 가소롭게도 한 때 자네와 절연할 생각까지 품었음을 고백한다네. 나는 스님을 보는 것은 물론이요, 스님의 글까지도 이제는 보고 싶지 않네만, 다만 차와의 인연을 끊어버릴 수 없으니, 두 해나 쌓인 체납세를 내게 보내시게. 다시 미루어 잘못을 반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이 좋을 것이네. 그렇지 않으면 덕산선사의 몽둥이를 맞아야 마땅할 것이고, 백천겁을 지낸다 해도 이 몽둥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네.”

 

참으로 애교스러운 협박이다. 따뜻한 농(弄)이 가득하면서도 차에 대한 갈망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다산이나 추사나 하나같이 차에 대한 무소유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들은 왜 이처럼 차를 갈망했을까. 차는 인간의 삶과 닮았고, 무욕과 깨달음의 세계로 가려는 여망이 닮아서 일 테다.

 

차 한 잔에 ‘쓰고, 떫고, 시고, 짜고, 단’ 맛이 다 들어있다고 한다. 차는 오감(五感)으로 마신다고 한다. 귀로 찻물 끓이는 소리를 듣고, 코로 향기를 맡으며, 눈으로 다구와 차를 보고, 입으로 차를 맛보며, 손으로 찻잔의 감촉을 즐기라는 것이다. 마치 ‘귀한 이와 교감’하는 모양새다. 차를 귀하게 대하다 보니 ‘선(禪)’과 함께 발달했다. 정성스럽게 잘 만들어진 차와 좋은 물, 차를 끓이는 여러가지 일을 ‘다도(茶道)’라 했고, 차를 마시는 행위와 수행을 하나로 봐 ‘다선일미(茶禪一味)’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고려 이규보는 “한 잔의 차로 곧 참선이 시작된다”고 하였으며, 후일 우리나라에서 다도를 완성한 이는 ‘초의선사’다. 초의선사는 나주 사람으로 속성은 장(張)씨이며, 자는 중부, 법명은 의순, 호는 초의, 별호는 일지암이다. 그는 제다법·끽다법 등을 정립했고, ‘한국판 다경’이라는 ‘동다송’(東茶頌)을 쓰고, ‘다신전’(茶神傳)을 엮어냈다. 그래서 우리는 초의를 ‘다성(茶聖)’으로 추앙한다. 그는 차에 깃든 정신을 ‘중정(中正)’이라고 했다. 어느 한쪽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곧고 올바름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일지암에서 40여 년간 주석하며 ‘선다일여(禪茶一如), 제법일여(諸法一如)’ 사상을 구현했다. 일지암은 대흥사로부터 가파른 산길을 30여분 더 오른 곳에 있다. 오솔길이었으면 더 좋으련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프리카, 남미의 커피에 내어준 우리 차(茶)의 자리, 되찾을 순 없을까

 

점심식사 후 요즈음의 도심 광경 중 하나는 길을 거닐고 있는 모든 이의 손에 아메리카노 한잔씩이 들려 있는 것이다. ‘식후연초’를 뛰어넘는 ‘식후커피’다. ‘별 다방’ 커피라면 자아도취로까지 이어지는 형국이다. 언제부터 다방이 커피숍이 된 것일까? 식후 ‘차 한 잔 주세요’ 부탁하면 차는 나오지 않고 커피가 나온다. 커피가 차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차는 제 이름을 커피에 내어주고, 대부분의 장소에서도 철수하여, 지금은 인사동과 광주등 전국 몇몇 곳에 겨우 근거지를 마련한 형색이다.

 

자신을 내어줘 버린 차와 구분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이제는 앞에 전통을 덧대어 ‘전통차’ 또는 ‘보이차’ ‘녹차’라 개명하고 말았다. 가짜가 진짜 자리를 차지했지만 불평하지 않고, 세상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눈감고 살아가는 게 현실이다. 마치 정치권의 모습과 닮았다. 부정이 관행이 되고, 관행은 잘못이 아니라는 어거지 등식이 판을 치고 있다.

 

우리나라 차문화를 세우고, 이끌어 온 곳은 전남이다. 차문화는 사람과 사람을 잇고 예술의 싹을 틔웠다. 차문화의 발전은 다구의 발달로 이어졌다. 다구는 소유자의 취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공예품이자 당대의 조형미와 정서를 표현한다. 강진의 청자 다구가 대표적이다. 필자 역시 부산 기장의 막사발부문의 무형문화재이셨던 고 신정희선생이 만드신 다구를 받아 지금껏 차를 마시곤 한다.

 

차문화는 또 다실이나 다실에 접하는 정원에도 영향을 미쳤고, 그림과 시로도 승화됐다. 차밭 또한 지리산을 기점으로 산청·하동에서 광양·보성·강진·해남에 이르기까지 남해안을 따라 띠처럼 펼쳐져 있다. 보성은 우리나라 차 생산량의 40%를 차지하는 주산지다.

 

차문화는 수양과 수행, 교류와 소통, 성찰로 이어지는 심신수양이요, 제다와 다도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전통문화다. 차문화가 살아나면 전라도와 우리나라의 문화와 예술, 경제도 다시 꿈틀거리게 된다. 이제 차문화를 현대적으로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생각해볼 때다. 우리의 차문화와 중국에서 전래된 차문화의 본질은 자기수양이다. 천년의 홍토에서 자란 차에 대한 욕심을 거두고, 그윽한 맛과 향, 오감으로 마시되 가난한 마음으로 마시며 바라볼 일이다.  

 

온 국민의 마음이 복잡다단한 오늘이다. 정치와 경제가 모두 복잡하고, 매일 매일이 시중 잡배와 다름없는 싸움질 판이다.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정치는 마음이 편안한 정치이고, 서로 협력하며, 상생하는 정치다. 따듯한 차 한잔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끽다거”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반성하게 하는 하루가 되기를 갈망해 본다.

 

 

 

이세훈 외교저널 및 UN JOURNAL 논설위원/ 경제학 박사 

 

 

 

이세훈 기자 moderato3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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