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정하 기자 | 이경모 / 미술평론가(예술학박사)
박혜련은 시간을 거슬러 세월의 흔적을 추적함으로써 인생의 유한함을 표현하거나 다양한 의미망을 가진 기호들을 화면에 나타내어 추상회화가 지닌 단조로움을 극복하는 실험적 작업에 천착하고 있다.
이때 추상회화의 물질성은 다양한 기호들에 의해 제어되는 듯 하면서도 풍부한 마티에르의 화면은 모더니즘회화가 지닌 추상성을 다각도로 드러내고 있다. 근대 추상회화의 개념에서 보면 이미 상당한 완성도를 지닌 화면은 문자나 기호, 혹은 유형·무형의 형상들과 어우러져 이야기구조를 지니는 듯하나 여전히 박혜련의 작업은 앵포르멜 추상의 매력적인 요소들을 포괄하고 있다.
박혜련이 최근 수행하고 있는 형태의 변주와 물질의 실험은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Time & Space>연작에서 작가는 모더니즘 시각에서 보면 이미 완결된 화면에 형상과 기호를 부가하여 반복적으로 소통을 추구하고자 하는 미적 열망을 보이는가 하면, 화면에 재료의 날것 그대로를 노출 시킴으로써 예술가로서의 노동의 흔적과 회화에서 물질이 지닌 의미, 그리고 이에 의해 드러나는 입체성에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 입체성이라는 것은 재료의 중첩과 형태의 구성, 층층이 겹쳐진 물감층에서 필연적으로 생성된 시간의 축적과 확장된 공간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노출된 물감의 물성과 이에 의해 드러나는 예기치 않은 회화적 효과, 그리고 작가의 미적 욕망이 만들어낸 문자와 형상의 연속성은 모더니즘회화가 지닌 절대성과 풍부한 물질성을 동시에 드러냄으로써 진정한 회화적 속성을 암암리에 드러내고 있다.
일단 박혜련의 작업은 강한 회화성을 띠는 완성도 깊은 화면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무채색의 단색조 화면은 이미 그 자체로 모더니즘 회화가 추구해온 물질에 대한 탐구와 화면의 물성 추구에 충분히 부합된다. 작가는 그리거나 쌓고 또 번지는 속성을 이용해 재료의 자연스러운 유동을 방임하는가 하면 이를 제어하기 위하여 강한 흡착력의 혼합안료를 사용하여 화면에 요철을 주거나 재료를 통제하기도 한다. 화면의 포지티브한 속성에 의해 재료를 풍부하게 흡수한 무채색조의 화면은 물성과 물성이 서로 교접하거나 돌출된 부분이 평면성에 이의제기하는 듯 하다가도 이내 화면과 일체가 되어 이에 몰입되곤 한다. 작가는 여기에 문자와 형태를 개입시킴으로써 소통성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공간에 갇혀있는 유형 무형의 형태들은 여전히 시간을 소환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각각의 존재들은 관계성의 총체이자 시간의 세계를 표상하는 지표로써 순환의 본질이자 자연율이라는 점이 규명된다. 그래서 작가는 ‘공간’에 갇혀있는 형상을 통해 사물의 본질이 상징하는 시간의 의미에 대해 발언하고, 더 나아가 그 안에 존재하는 근원적 형상을 통해 현대인의 실존적 삶의 의미를 자문(自問)하고 있다. 결국 작가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진행해온 일련의 작업들은 통념적 시공개념에 대한 재해석과 변증법적 방법론을 통해 가변적 관계의 총체로 정의되는 시간성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의 그림에 비해 대상들의 서사구조와 세월의 의미에 비중을 둔 <Time & Space> 연작은 소재들의 필연적인 구조에서 공간분할의 감각이 상당히 요구되는 작업과정이 필요하며, 그렇게 완성된 박혜련의 작품은 비로소 시의 구조를 파헤치듯 조금씩 음미 된다.
이러한 박혜련의 작업과정은 “흘러가고 있는 시간’을 위한 하나의 노동 행위”로 읽혀지기도 한다. 흘러가고 있는 시간은 ‘순환’을 역설(力說)한다. 박혜련의 작업은 하나의 사물을 통해 다른 사물을 바라보는 형태들, 대상들이 엇갈려서 등장하는 일반적이지 않은 각도에서 관찰한 것들이 많다. 해당 사물들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시점들을 통해 공간을 암시하고 시간을 표상하는 접근법인 것이다.
개별 대상의 구조나 형태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의 내적 긴장과 숨은 의미, 이른바 시간적 순환성은 박혜련 작업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하나의 추상회화이기 이전에 자연의 섭리와 인간적 삶의 의미망을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적 사유의 반영이자 그 과정에 존재하는 하나의 조형언어라고 읽혀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