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길주 외교부 출입 기자 | 2025년의 끝자락, 대한민국 외교는 명백한 시험대에 올랐다. 정부가 내세운 기조는 ‘실용 외교’지만, 국제 환경은 그보다 훨씬 냉혹하다. 중국은 관계 복원을 위한 정상 외교의 문을 열었고, 미국은 동맹의 가치를 성과 목록에서 지워버렸다. 여기에 글로벌 분쟁의 확산과 방산 수출이라는 기회 요인까지 맞물리며, 한국 외교는 선택의 외교가 아닌 생존의 외교를 요구받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의 교차점에서 한국 외교는 ‘선택’이 아닌 ‘관리’를 강요받고 있다.
1. 방중 카드 꺼낸 이재명 대통령… 한중 관계 ‘관리 국면’에서 ‘복원 국면’으로
이재명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1월 4일부터 3박 4일 일정의 국빈 방중에 나선다. 취임 7개월 만에 이뤄지는 첫 중국 방문이자, 한국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으로는 2017년 이후 9년 만이다.
이번 방중의 핵심은 ‘전면 복원’이라는 정치적 선언과 ‘실질 관리’라는 경제적 계산의 결합이다. 정부는 사드(THAAD) 이후 사실상 동결 상태였던 한중 관계를 정상 외교 궤도로 복귀시키겠다는 입장이지만, 그 이면에는 명확한 현실 인식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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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망과 경제안보
삼성, SK, 현대차 등 주요 그룹 총수 동행은 상징적이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중국은 여전히 한국 제조업 공급망의 핵심 축이다. 반도체 원자재, 배터리 소재, 희토류 등 ‘차단될 수 없는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한 핫라인 구축이 실질적 의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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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역사적 메시지
이 대통령의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방문은 단순한 의전 일정이 아니다.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50주년을 계기로 한 이 행보는, 중국 내 항일 서사를 존중하면서도 한중 관계를 ‘역사-경제-안보’의 입체 구조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2. 한반도 없는 성과 보고서’… 도널드 트럼프 2기 미국의 경고 신호
반면 한미 동맹의 체온은 분명히 낮아졌다. 미 국무부와 국방부가 공개한 ‘2025년 성과 보고서’에서 한반도 비핵화, 주한미군, 한미 동맹 관련 표현이 전면 삭제된 것은 상징적이다.
보고서가 강조한 성과는 단 두 가지다.
① 국경 통제 강화
② 동맹국 방위비 분담 확대
“한반도 문제를 전략적 우선순위에서 후순위로 미루고, 동맹을 ‘안보 공동체’가 아닌 ‘비용 분담 계약’으로 재정의하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향후 방위비 분담금(SMA) 협상에서 한국이 직면할 압박은 단순한 증액 요구를 넘어, 주한미군 주둔의 조건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3. 실용 외교의 성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폴란드 ‘천무’ 5.6조 원 계약의 전략적 의미
외교 환경이 불안정한 가운데서도 실질 성과는 분명하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폴란드와 약 5.6조 원 규모의 ‘천무’ 다연장 로켓 추가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폴란드와의 방산 협력 규모는 15조 원을 넘어섰다.
이번 계약의 핵심은 '수출’이 아니라 ‘현지화’다. 현지 합작법인 설립과 기술 이전을 포함한 구조는 한국 방산이 단순한 무기 공급국을 넘어 유럽 안보 생태계의 일부로 편입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에 한국 외교의 새로운 카드다. 미·중 갈등 속에서 방산과 산업 협력을 외교 레버리지로 활용하는 전략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4. 동남아의 또 다른 전선… 태국–캄보디아 ‘드론 전쟁’이 던지는 경고
한편 국제 질서는 주변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분쟁은 자폭 드론과 F-16 전투기까지 동원되는 무력 충돌로 비화했다. 이는 저강도 분쟁이 고기술 전쟁으로 급속히 전환되는 시대적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 외교부는 특별여행주의보를 발령했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 너머에 있다.
한국 기업과 교민이 밀집한 동남아에서의 불안정은 공급망·해외투자·국민 보호 외교 전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재명 정부는 1월 중국 방문 직후 일본 방문(1월 13~14일 예정)을 통해 미·중·일 외교의 삼각 구도를 본격 가동한다. 이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겠다는 신호가 아니라, 미,중,일 주요국에 대한 이재명 정부의 실용외교를 위한 적극적인 행보 선언에 가깝다.
문제는 이 균형이 더 이상 선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은 비용을 요구하고, 중국은 정치적 공간을 요구한다.
그 사이에서 한국은 정교한 실익 계산과 명확한 관계 설정을 통한 국가적 차원의 외교전략이 요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