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길주 외교부 출입 기자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전 세계 지정학·안보·경제 질서를 구조적으로 재편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2026년 현재 국제사회는 ‘안보가 곧 경제’가 되는 신(新)냉전 환경 속에서, 전쟁 이후를 대비한 실리 중심 외교 전략 수립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핵심 화두는 더 이상 ‘전쟁의 승패’가 아니라, 누가 재건을 주도하고 그 과정에서 외교적 주도권을 확보하느냐에 있다.
전쟁의 경제학 측면에서 전쟁은 인류에게 참혹한 비극이지만, 냉정한 국제정치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경제 질서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글로벌 흐름을 ‘재건 특수’와 ‘자원·에너지 안보’라는 두 축으로 분석한다.
우선 우크라이나 재건 프로젝트는 단순한 복구 사업을 넘어, 동유럽 전체의 산업·물류·에너지 체계를 재설계하는 장기 과업이다. 도로·철도·항만·전력망은 물론 스마트시티, 디지털 행정, 친환경 에너지 인프라까지 포함되는 초대형 사업으로, 서방 국가들의 대규모 자본 투입이 예고돼 있다. 이에 따라 건설·플랜트·IT·에너지 기술에서 경쟁력을 보유한 국가들은 이미 외교 채널을 총동원해 ‘재건 외교전’에 돌입한 상태다.
동시에 러시아의 자원 잠재력 역시 국제사회가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변수다. 전쟁 장기화로 경제적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여전히 석유·가스·곡물이라는 전략 자원을 보유한 핵심 공급국이다. 한 국제 에너지 전문가는 “러시아의 국제적 입지가 약화됐다고 해도, 에너지와 식량 시장에서의 영향력은 구조적으로 남아 있다”고 진단한다.
이 같은 실리 중심 국제 환경 속에서 최근 푸틴 대통령의 발언은 외교적 함의를 지닌다. 그는 지난 15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주러시아 대사 신임장 제정식에서 한국과의 관계 회복 의지를 비교적 명확히 드러냈다.
푸틴 대통령은 “안타깝게도 한국과의 상호작용에서 긍정적 자본이 상당 부분 고갈됐다”고 평가하면서도, “과거 양국은 실용적인 접근을 통해 무역과 비즈니스 분야에서 매우 좋은 성과를 거뒀다”고 언급했다. 이어 “한국과의 관계 회복을 기대한다”고 밝히며, 한러 관계 정상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는 과거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가능성에 대해 “살상 무기를 공급한다면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강경 경고했던 태도에서 한 발 물러난 것으로 해석된다. 외교가에서는 이를 전후 재건 국면에서 한국의 건설·산업 역량을 다시 의식한 실용적 메시지로 분석하고 있다.
한국은 글로벌 시장에서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건설·플랜트 수행 능력을 입증해 왔다. 중동, 동남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극동 지역까지 축적된 경험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모두에게 매력적인 자산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한국의 ‘포스트 전쟁 외교 전략’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 한미· 한EU 공조를 기반으로 인프라·에너지·디지털 분야에서 우크라이나 현대화의 주도적 역할을 확보해야 한다.
-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실용적 성공 모델’을 지렛대로 삼아, 종전 이후 에너지 안보와 극동 지역 경제 협력의 여지를 전략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 특정 진영 의존도를 줄이고, 글로벌 사우스 및 신흥국과의 연대를 강화해 공급망 리스크를 구조적으로 분산해야 한다.
전쟁 이후의 국제 질서는 더 이상 이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재건을 누가 설계하고, 누가 수행하며, 그 과정에서 어떤 외교적 신뢰를 축적하느냐가 곧 국력으로 직결된다. 한국은 명분과 실리 사이의 정교한 균형을 통해, ‘전쟁의 주변국’을 넘어 ‘재건 경제의 핵심 행위자’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회고한 과거의 ‘실용적 성공 경험’을, 미래 지향적인 안보-경제 복합 외교 전략으로 재해석할 수 있을지 그 선택이 한국 외교의 다음 단계를 결정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