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에 빠진 미일 동맹

  • 등록 2026.03.20 09:4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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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의 '호르무즈 파병' 압박과 다카이치의 '평화헌법' 방어전
- 파병 대신 택한 '청구서 결제'… 108조 원 규모 대미 투자 약속
- 회견장 얼어붙게 만든 트럼프의 '진주만' 돌발 발언

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길주 외교부 출입 기자 |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미일 정상회담은 굳건한 동맹을 재확인하는 자리인 동시에,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 앞에서의 복잡한 동맹의 청구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무대였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對)이란 군사 작전으로 전 세계 석유 물동량의 핵심인 호르무즈 해협이 마비된 가운데, 이번 회담의 핵심 의제는 단연 '동맹국의 안보 기여도'와 '글로벌 에너지 위기 대응'에 집중되었다.

 

 

미,일 주요 매체는 이번 정상회담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워싱턴포스트(WP): "트럼프는 다카이치로부터 108조 원이라는 '수표(Check)'를 받아냈지만, 호르무즈 해협의 미 해군을 지원할 군함은 얻지 못했다"며, 이번 회담이 동맹의 군사적 결속보다는 경제적 거래에 치중되었음을 지적했다.

  • 월스트리트저널(WSJ): 향후 이란 사태가 악화되어 실제 무력 충돌이 격화될 경우, 단순히 돈만으로는 미국의 파병 요구를 계속 비껴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으며, '진주만' 발언 역시 단순한 농담을 넘어, 동맹국들의 안보 무임승차에 대한 트럼프의 뿌리 깊은 불신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 요미우리 & 아사히 신문: 다카이치 총리가 '경제 안보'라는 명분으로 트럼프를 달래는 데는 성공했으나, '진주만' 조롱을 면전에서 듣고도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못한 점이 국내 정치적으로 상당한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 니혼게이자이(닛케이): 일본 기업들이 짊어져야 할 730억 달러 규모의 미국 내 신규 투자(반도체, 핵심 광물)가 실제 수익성으로 이어질지 의문이라며, '정치적 목적으로 강요된 경제 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번 회담에서 가장 큰 쟁점은 호르무즈 해협 보호를 위한 일본의 군사적 기여 여부였다. 원유 수입의 9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는 일본의 아킬레스건을 쥔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과 아시아 동맹국들을 향해 군함 파견을 강하게 압박해 왔다.

 

다카이치 총리헌법 제9조(평화헌법)와 자위대의 국외 파병을 엄격히 제한하는 일본의 국내법적 제약을 방패로 삼았다. 다카이치 총리는 회담 후 "일본의 법적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히 설명했다"며 직접적인 파병에는 선을 그었다. 이는 국내 반전 여론과 교전국 개입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군사적 지원에 난색을 표한 일본이 미국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꺼내든 카드는 '대규모 경제 투자'와 '밀착 외교'였다.

다카이치 총리는 기존 5,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에 더해 핵심 광물 및 반도체 등 3대 신규 프로젝트약 730억 달러(한화 약 108조 원)를 추가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치솟는 국제 유가에 대응하기 위해 양국 간 '전략비축유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미국의 에너지 생산 확대에 적극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파병 불가에 따른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실용적인 경제 안보 협력으로 동맹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일본 측의 정교한 계산이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화기애애하게 연출되던 회담 분위기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불거진 돌발 발언으로 급반전되었다. 미군이 이란 공습에 앞서 일본 등 동맹국에 사전 통보를 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는 기습을 원했다. 기습에 관해 일본보다 더 잘 아는 나라가 어디 있나? 왜 진주만 공습에 대해 미리 말해주지 않았나"라고 답한 것이다.

 

다카이치 총리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히 생중계된 이 장면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는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동맹국이 겪어야 할 예측 불가능성과 외교적 난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언론의 대서특필을 낳았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번 회담에서 미국의 시선이 중동에 쏠리는 사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과 북한의 도발 등 안보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일본의 깊은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강력한 억지력이 변함없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 것이다.

 

이번 미일 정상회담은 중동 위기 속에서 동맹국들이 미국의 군사적 요구와 자국의 법적·정치적 한계 사이에서 어떻게 줄타기를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특히, 파병 요구를 대규모 경제 투자로 치환하는 일본의 '투자를 전제로 한 외교'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얼마나 지속 가능한 해법이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길주 기자 aromaess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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