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노동의 정의를 새롭게 정립하다.
- 노동의 패러다임, 생존에서 자기실현으로
- 지식 기반 사회, 모두가 창조의 주체가 되는 시대
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정하 기자 | 과거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던 노동은 이제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창조적 행위로 변화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는 황폐한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서야 했다. 대한민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국가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고, 국민은 생존을 위해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노동자’가 되어야만 했고, 노동은 곧 생존이자 가치 그 자체였다. 그러한 노동 중심의 시대는 대한민국 사회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지만, 지금은 그 성격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 일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일의 의미와 작동 방식은 과거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며 우리는 생존을 위한 노동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교육 수준의 비약적 향상과 정보 접근성의 확대를 통해, 더 많은 지식을 흡수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 역량을 갖춘 지식인의 집합으로 변화해 왔으며, 단순 반복과 수행 중심의 노동에서 벗어나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노동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한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일하고 있지만, 그 일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질문해야 한다. ‘노동이 사라지는 시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편집자주] 1. 노동이 이끈 시대, 그 끝자락에서 오늘날 대한민국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는 크고 작은 노사 갈등과 노동쟁의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파업과 대립, 협상의 결렬과 반복되는 충돌은 이제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그 강도는 날로 첨예해지고, 갈등의 구조는 점점 더 고착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현실을 단순히 임금과 복지의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노사 갈등과 노동쟁의가 이어졌고, 그때마다 다양한 제도적 조정과 협상 방식이 시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잠시 잠재워졌을 뿐, 갈등의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고, 그 결과 사회는 갈등의 피로 속에서 점점 더 무기력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노사 갈등의 뿌리가 단순한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지금의 노사 갈등은 한 세대의 권리 투쟁이나 제도적 미비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정의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갈등은 ‘노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더 이상 지금의 시대와 맞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노동을 단순히 생산성의 도구로 보고, 노동자를 비용의 항목으로만 인식하는 그렇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제도 조정이 아닌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 노동자에 대한 인식전환입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노동개혁이 시작됩니다. 지금 우리는 분명히 새로운 전환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기술의 변화나 산업구조의 개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 시점이 도래했다는 뜻입니다. 노동개혁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시대의 요청입니다. 특히, 산업화를 기반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낸 대한민국은 이제 그 성숙한 경험과 통찰을 바탕으로, 노동개혁의 새로운 기준과 모델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는 황폐한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서야 했습니다. 대한민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국가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고, 국민은 생존을 위해 몸을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노동자’가 되어야만 했고, 노동은 곧 생존이자 가치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한 노동 중심의 시대는 대한민국 사회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지만, 지금은 그 성격이 서서히 변하고 있습니다. 일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일의 의미와 작동 방식은 과거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며 우리는 생존을 위한 노동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교육 수준의 비약적 향상과 정보 접근성의 확대를 통해, 더 많은 지식을 흡수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 역량을 갖춘 지식인의 집합으로 변화해 왔으며, 단순 반복과 수행 중심의 노동에서 벗어나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을 비롯한 국제사회 곳곳에서는 여전히 크고 작은 노사 갈등과 노동쟁의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강도는 더욱 첨예해지고, 갈등의 구조는 더욱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현실을 과거의 연장선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갈등은 단지 임금이나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를 새롭게 찾을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시대는 이미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제도의 조정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 즉, 바로 자기 인식의 전환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단순히 ‘일을 수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문제를 탐구하고 의미를 재구성하는 존재로 바라볼 때, 전환은 시작됩니다. 우리가 노동자가 아닌 ‘연구원’으로 전환될 때, 더 이상 노사라는 이름의 갈등 구조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문제를 지시와 복종의 관계로 해결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함께 탐구하고 설계하는 관계로 전환될 때, 갈등은 자연스럽게 구조적으로 해소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마주한 갈등은 단지 타협과 조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노사라는 구도 자체가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 갈등을 넘는 방식으로 ‘사람’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노동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일하고 있지만, 그 일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질문해야 합니다. ‘노동이 사라지는 시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2. 지식의 시대, 모두가 지식인이 된 사회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교육의 확산과 정보 접근의 비약적인 향상은 우리 모두를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 역량을 갖춘 존재로 변화시켜 왔습니다. 이는 더 이상 지식인이 특정 계층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전쟁 직후의 세계는 지식의 양과 질 모두 부족했으며,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사람 역시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우리는 전례 없는 속도로 정보를 흡수하며, 고등교육을 받은 시민들이 사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더 이상 지식인은 특정 계층만의 이름이 아닙니다. 이제는 누구나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과 판단력을 갖추고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분명해집니다. 지식 기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일정 부분 지식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여전히 ‘지시를 따르는 노동자’로 대우한다면 그것은 인재의 낭비이자 시대의 역행입니다. 이제는 사람을 단순한 수동적 실행자로 머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맞이한 사회는 단지 정보가 넘쳐나는 환경이 아닙니다. 지식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점차 사회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지식 사회'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그에 걸맞은 새로운 인재상이 요구됩니다. 그 인재상은 과거처럼 지시받은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문제를 재정의하며 새로운 해결 방안을 설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3. 사람은 더 이상 ‘노동력’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업은 여전히 사람을 ‘노동력’이라는 이름의 자원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성과가 낮으면 도태시키고, 자율은 통제 속에 가두며, 인간을 효율이라는 잣대로만 평가하는 조직 문화가 여전히 만연합니다. 이 구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 틀에 갇히지 않고, 주도적으로 문제를 탐색하고 해결해 나가려 합니다. 여기서부터 수동성과 능동성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 차이는 단지 시스템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결국, 같은 환경 속에서도 어떤 이는 단순 수행에 머무르고, 또 어떤 이는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그 갈림길에 놓인 것이 바로 ‘일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의 차이는 결국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게 됩니다. 하나는 주어진 일을 따르며 움직이는 사람, 다른 하나는 스스로 문제를 찾고 구조를 재구성하려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단순한 수행자가 아닌 스스로 문제를 탐구하고 확장하는 존재, 곧 '연구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자’와 ‘연구원’은 특정 직군이나 역할을 뜻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어떤 자세로 일하느냐에 따라 노동자가 되기도 하고, 연구원이 되기도 합니다. 노동자는 ‘일을 주는 사람’과 ‘그에 대한 대가’를 중심에 둡니다. “얼마나 받느냐”가 중요하고, 그에 따라 “얼마만큼 일할 것인가”가 정해집니다. 자신의 시간을 잘게 쪼개어 팔고,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노동자는 자연스럽게 돈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상이 줄어들면 일의 동기도 함께 사라지기 쉽습니다. 반면, 연구원은 돈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연구원은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연구원은 자기 질문에 의해 움직이며, 문제에 몰입합니다. 어떤 공간이든, 어떤 시간이든 연구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출근 여부와 상관없이 문제를 품고 있고, 보상 여부와 관계없이 탐구를 계속합니다. 노동자는 시간 안에 일하고, 연구원은 시간 너머로 사유합니다. 노동자는 결과에 따라 움직이고, 연구원은 질문에 따라 움직입니다. 노동자는 ‘일을 지시받는 사람’이고, 연구원은 ‘사회를 위한 해답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지식 사회는 더 이상 노동자를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이제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는 단순히 ‘업무를 수행하는 자’가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더 나은 구조를 기획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이제 노동자가 아니라, ‘문제를 품고 살아가는 실천적 연구원’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4. 일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의 외형이나 방식 자체를 바꾸기보다, 그 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정해진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는 것을 넘어, 그 일이 왜 존재하는지 묻고, 어떤 방식이 더 나은지 고민하며, 전반적인 흐름과 구조를 재설계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와 실천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과 관찰, 시도와 반성, 의미 재구성의 연속, 즉 ‘연구’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연구란 학문적 의미의 연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연구원은 일상 속에서, 조직 속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끊임없는 탐구와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바로 그런 사람이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입니다. 우리는 이제 모두가 실천하는 연구원이 되어야 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5. ‘노동개혁’이 아니라 ‘사람개혁’ 그래서 진짜 노동개혁이란 무엇일까요? 단순히 근로시간을 줄이거나 임금체계를 손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스스로도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정의해야 합니다. 노동자가 아닌, 연구원, 설계자, 창조자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자기 혁신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수많은 노사 갈등 역시, 결국은 이러한 인식 전환 없이 반복되는 구조적 결과입니다. 문제는 조건이 아니라, 정체성입니다. 노동자라는 틀 안에서는 대립이 전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연구원으로 전환될 때, 우리는 갈등의 구조를 넘어서 문제를 함께 설계하는 존재가 됩니다. 물론 개인의 태도 변화만으로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연구원의 태도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조직과 사회 역시 그것을 지지할 수 있는 구조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변화는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제도가 완비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떤 태도로 일과 삶을 대할지를 다시 질문하는 것이 진짜 개혁의 시작입니다. 이런 전환이 시작될 때, 기업은 단기적 생존을 넘어 스스로 진화하는 조직이 될 수 있고, 사회 전체는 새로운 성장 중심의 생태계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 전환은 단순한 개편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적 흐름입니다. 6.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단지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나만이 아닙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 즉 세대와 직군을 넘어 함께 이 사회를 구성하는 존재들 모두를 뜻합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해서 먹고살까?'라는 생존 중심의 질문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대신,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라는 연구원의 질문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개인의 진로 선택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일은 더 이상 개인만의 몫일 수 없습니다. 이제는 사회와 조직도 함께 이 질문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에 대한 답을 함께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왜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가?" 노사 간의 갈등, 사회 곳곳의 대립, 집단 간의 투쟁은 오랜 시간 정당한 권리를 위한 싸움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이 싸움이 장기화되고 일상화될수록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더 지쳐갑니다. 삶은 팍팍해지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점점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며, 결국 삶 자체가 투쟁의 장으로 변해갑니다. 투쟁이 삶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인생을 살지 못하고 ‘싸우기 위해서 사는 존재’가 됩니다.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며 거리에 나서고, 더 좋은 조건을 위해 끝없는 줄다리기를 이어갑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더 돈에 매이고 있습니다. 마치 돈이 해결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처럼 믿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투쟁의 끝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한 투쟁을 했던 것일까요? 돈의 노예가 되지 말자고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더 많은 보상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을 반복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얽매는 역설적 구조에 갇혀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구조는 단지 직장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싸움과 대립이 일상이 된 사회는 가정 안으로도 그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청소년들은 어른들이 갈등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랍니다. 그 결과 우리 아이들에게 세상은 자연스럽게 ‘불신’과 ‘경쟁’이 기본값인 곳으로 각인됩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고, 아이들의 미래를 점점 더 암울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되물어야 합니다. 정말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회인가? 정말 이것이 우리가 후세에게 물려주고 싶은 모습인가? 우리는 ‘노동’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오래 싸워왔습니다. 이제는 그 개념 자체를 다시 설계할 시간입니다. 이제는 사회를 설계하고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라, 스스로를 설계하고, 사회를 공동으로 창조해가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돈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돈을 우리의 삶을 디자인하는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연구원으로서, 설계자로서, 창조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중심’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 결과 돈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한 수단이 아닌, 내가 사회에 기여한 만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가 됩니다. 돈은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구조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환은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연구하고 함께 설계할 때, 비로소 이 구조는 현실이 됩니다. 사회 전체가 더 나은 흐름을 함께 설계하고 실천하는 창조자 주체들로 구성될 때, 우리는 단지 돈을 버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와 삶을 주도적으로 디자인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설계자’들이 많아질 때, 이 나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건강한 국민이 이끄는 건강한 국가로 변모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전환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갈등의 근원은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도가 아무리 바뀌어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노동 개혁’을 말하게 된 것도, 사고의 정체와 시대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충돌이 반복되는 한, 투쟁과 대립은 끝나지 않고,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노동 개혁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의 진짜 노동개혁은 곧 사람개혁이며, 사람개혁은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 다시 말해 ‘인식의 전환’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노동자’라는 이름 아래 살아가는 시대를 마감해야 합니다. 더 이상 노동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부를 이름은 스스로 문제를 품고 설계하며 살아가는 ‘실천적 연구원’입니다. 그것은 단지 직업의 변화를 뜻하지 않습니다. 노동의 시대, 그 개념 자체가 이제 막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노동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에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며,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시간이 도래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구원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대한민국이 그 새로운 전환의 시작점에 서 있습니다. 단순히 빠르게 일하는 사회가 아니라, 더 깊이 사고하고 더 멀리 바라보는 사회.‘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개인과 조직,그리고 그들을 지지하고 함께 나아가는 국가. 이제, 대한민국이 ‘노동의 정의’를 새롭게 정립합니다. 성찰과 전환이 필요한 지금, 변화는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