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푸른 숲과 울창한 나무를 만드는 십년지계

 

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세훈 논설위원 | 4월이다. 온 산이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바람은 온화하며, 땅에는 온갖 꽃들이 매일매일 새로운 옷을 갈아 입고 피어나는 계절이 되었다.

 

중국 제나라 재상 관중이 썼다고 알려진 <관자>라는 책에 “곡식을 심는 것은 일년지계(一年之計)요, 나무를 심는 것은 십년지계(十年之計)이며, 사람을 심는 것은 종신지계(終身之計)”라는 구절이 있다. 종신지계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을 키우는 교육은 단지 100년짜리 계획이 아니라 평생 갈 계획이라는 말이다.

 

관중의 글은 여기까지는 제법 알려져 있지만, 뒤 구절까지 모두 인용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곡식은 한 번 심어서 한 번을 얻고, 나무는 한 번 심어 10배를 얻고, 사람은 한 번 심으면 100배를 얻는다.”는 말이다. 즉, 나무는 십년계획으로 10배를 벌고, 교육계획은 100배의 이득을 가져다 준다는 경제적 의미가 추가적으로 더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곡식이나 나무가 심어 놓는다고 잘 자라는 것이 아니다. 농부가 일년지계로 곡식을 기를 때, 봄부터 일을 해서 가을이 되어서야 겨우 빛을 본다, 십년지계라는 나무도 10년은 키워야 비로소 빛을 본다.

 

떄는 1964년 12월 중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탄 전용기가 대한해협을 건너 경북 포항의 영일만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파독(派獨)광부를 만나고 일본을 경유해 귀국하는 길이었다. 대통령의 눈에 비친 영일 지구는 거대한 황무지였다. 뻘건 민둥산 천지를 내려다보던 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헐벗은 산을 두고 조국의 근대화는 더없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밥 지어먹고 혹독한 이 겨울을 이겨낼 땔감조차 없는 현실이 문제였다. 춘궁기 소나무 껍질로 죽을 만들어 연명하던, 두껍고 단단한 가난의 껍질을 어떻게 벗겨낼 지 막막하기만 했다. 대통령은 답답했다.

 

“나무를 많이 심으면 된다는 희망으로 마음을 추스르면서 비행기의 좌석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앞날의 걱정이 태산처럼 밀려왔다”고 당시의 상황은 전한다.

 

박 대통령은 1965년, 나무심기에 많은 예산을 편성하고, 민둥산에 나무 심는 일을 젊은이들을 위한 일자리로 만들었다. ‘치산녹화(治山綠化) 정책’이라 부르는 거대한 국책 프로젝트가 비로서 시작된 것이다.

 

그해 6월 농림부 산림국은 ‘산림부’로 승격됐고 1966년 7월 ‘산림청’ 발족 법안이 임시국회를 통과했다. 1967년 1월 마침내 현재의 산림청이 탄생했다.

  

초대 산림청장으로 부임한 이는 김영진(金英鎭) 청장이었는데, 김청장은 1월 9일 대대적인 개청식을 갖고 치산치수를 제1목표로 청와대와 핫라인을 구축, 본격적인 나무심기와 사방(砂防·산·바닷가·강가 등에서 모래나 흙이 비·바람에 씻기어 떠내려가는 것을 막는 일)사업에 돌입했다.

 

당시, ‘차관급’ 공무원이 수장인 ‘청(廳)’ 단위의 정부기구에서 청와대에 직통으로 업무현황을 보고하는 기관은 정보기관을 제외하고는 산림청이 유일했다.

 

산림청은 먼저 정부에서 시행하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의 첫째 목표인 ‘식량을 자급하고 산림녹화와 수산개발에 주력’하는 계획을 착수하고, 사방사업과 연료림(燃料林·땔감용 나무) 단기조성 등 산림녹화를 조식에 완수해 자연재해 때문에 해마다 겪는 흉년 농사를 치유하는 정책을 폈다.

 

인구밀도가 높은 서울을 비롯한 경인지구에 땔감 나무의 반입을 금지하는 강경책을 도입했고 수도권 가구에 무연탄 보급을 확대하는 정책도 폈다. 어느덧 황량한 민둥산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무심기 사업에 참여한 작업인부나 마을 주민들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별다른 운반기계가 없는 상황에서 사업성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산 밑에서 좋은 흙을 한 짐씩 짊어지고 올라가 사방사업지의 씨 뿌릴 자리와 나무 심을 자리에 흙을 깔아야만 했다. 당시 작업인부로 참여한 마을 주민들의 임금은 정상 임금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밀가루가 노임으로 지급되었다.

 

그런데도 인부 동원에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밀가루를 받는 일자리마저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밀가루 한 됫박을 받아갈 때를 생각하고 가족을 위한 그 순간만을 생각하면서 참고 열심히 일한 결과이다. 정성을 다하여 심은 나무는 어느덧 민둥산을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1975년 4월 18일 경북 포항의 영일 사방사업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영일지역은 나쁜 토양 탓에 사방 4538ha가 폐허였으나 5년여 만인 1977년 대역사를 완료하고 푸른 숲으로 변했다.

 

1973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정운영에 관한 연두기자회견에서 나무심기 성공을 위한 새로운 각오를 밝히게 된다. 나무심기를 강도 높게 추진해 확실한 국토녹화를 이끌겠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전 국토를 녹화하기 위한 10개년 계획을 세워 푸른 강산으로 만들겠다”고 국민과 약속했다.

 

대통령의 선언이 선포되고 사흘이 지난 1월 15일 산림청장 인사가 단행됐다. 당시 실세로 통했던 손수익(孫守益) 경기지사가 산림청장으로 부임했다. 손 청장은 내무부 지방국장 시절, 새마을운동 창안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는 박 대통령이 서울~춘천 간 국도변을 시범적으로 정비하라는 지시를 받고 1년 만에 대대적인 정비를 끝낸 불도저였다.

 

그러나, 당시의 녹회사업은 예산도 적었지만 그나마 효율적으로도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기후와 토양에 알맞은 수종을 연구개발해야 했고, 개발한 묘목들을 많이 생산해 인근 부락에 공급해야 하는데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생각하는 자세는 고쳐져야만 했다.

 

이때까지 나무가 곧 경제라는 개념도 없었다. 이는 단지 녹화사업이 민둥산을 푸르게 하는 일에 불과했고, 국가 10년의 경영목표로서 경제적 관념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태였다.”

 

이후 “산림청은 내무부로 옮겨지게 되었고, 산림청이 내무부로 이관된 후, 치산녹화 10년 계획은 내무부에서 짜게 됐다. ‘절대녹화, 절대보호’라는 전대미문의 치산녹화 10년 계획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주요 내용은 <조기녹화를 속성수와 장기수 비율을 7대 3으로 하고, 국민식수 편의를 위해 10대 수종을 표준화하며, 양묘는 마을 주민의 소득에 보탬을 주면서 협동심을 배양하기 위해 현사시나무(버드나뭇과), 이태리포플러 등 양묘를 전량 마을 주민들이 협동해 생산해야 한다.

 

또한,  주민들에게 소득이 돌아가도록 하는 마을 양묘를 도입하고, ‘절대보호’지에서 산불이 발생하는 경우, 100ha 이상의 임야가 불에 타면 시장·군수는 면직한다.는 내용이다. “첫째도 산, 둘째도 산! 첫째도 새마을, 둘째도 새마을!”이라는 지침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날부터 치산녹화 사업은 새마을운동과 똑같이 내무부 공무원이 총동원되어 진행하게 됐다.

   

지금도 생각나는 표어가 있다.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 라는 현수막이다. 산림청에서는 현수막을 만들어 전국 곳곳에 내걸었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는 대형 아치를 세워서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라는 표어자체가 국민들은 산사랑, 나무사랑, 나라사랑을 떠올리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도록 하였다. 

 

새마을운동과 병행한 치산녹화 사업은 세계 각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세계은행에서 차관으로 돈을 빌려 나무를 심는다는 사실이 세계적 뉴스거리로 등장하기도 했다. 1976년부터 77년까지 2년 동안 12만7000ha의 연료림을 조성했다는 점, 새마을사업차관으로 416만 3000달러를 빌려 나무 심는 데 드는 비용과 인건비로 지불했다는 점이 외국인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대부분이었지만 정부에서 부역(賦役)으로 출역하도록 종용했던 사실과 같은 병폐도 나타났다. 치산녹화 사업이 농촌주민들의 무보수로 봉사하는, ‘부역’으로 상당 부분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 지기도 하였다. 

 

1973년부터 시작된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은 6년 만인 1978년에 완료됐다. 108만ha에 나무를 심었고 420만ha의 육림(숲을 가꾸는 일)을 조성했으며 4만2000ha의 사방사업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리고 30억 그루의 양묘를 생산해 조림했다.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 사업에는 전국 3만4000여 단위마을 전체가 총력을 쏟아 참여했다. 새벽종이 울리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 뛰었던 덕분에 치산녹화에 성공한 것이다. 치산녹화는 조국 근대화의 중심사업으로 뿌리내리며 조국 근대화의 유지 계승 토대를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 정부의 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 뒤인 1949년 식목일을 법정공휴일로 제정해 발표했다. 대한민국의 산림을 헐벗은 상태로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점에 이처럼 일찍 눈을 뜬 분이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영월에 석탄개발공사를 만들어 산에서 땔감으로 나무를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추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정부는 대대적인 조림을 추진하여 푸른 산을 일구어 갔다.

 

그러나, 6.25전쟁은 다시금 전국을 황폐한 산을 만들었고, 전 국민이 매 해 지속한 나무심기와 가꾸기가 반복됨에 따라 반세기가 지난 지금 대한민국의 땅은 푸르름 그 자체이다.

 

정부의 노력과 함께 대한민국 산림녹화의 주역이자 국내 임학박사 1호인 故 향산 현신규 박사의 (1912~1986)의 산림부국 정신과 업적도 빼어 놓을 수 없다. “임업을 천직으로 생각한 분으로, 산림은 국부의 상징이며 사람을 속이지 않는 나무에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신조와 철학을 가지신 분이었다.

 

故 현신규 선생은 70년 전인 1949년 규슈대학 농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대한민국 임학박사 1호'로 일본 학술계에서도 명성이 높은 분으로 현 선생은 우리의 푸른 국토를 가꾸는 데 전 생애를 바친 대한민국 산림녹화의 산 증인이자 나무와 나라를 사랑한 임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전쟁이 끝난 지 석 달 만인 1953년 10월 서울대 농대에 육종학연구소를 만들어 리기다소나무와 테다소나무를 교배한 '리기테다소나무'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이 종은 세계에서 3번째로 성공한 교잡종으로 추위에 강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을 지녀 '기적의 소나무'로 불리고 있다.

 

현신규 선생은 “산 푸르고 못 사는 나라 없다”며 산림 부국론을 주창했다.

 

또한, 유럽 원산인 은백양 나무에 토종수원사시나무를 접목해 개량한 속성수인 잡종포플러 '은수원사시나무(현 사시나무)'도 현 박사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이 나무들은 이후 우리의 산림녹화와 산지자원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1982년 UN 식량농업기구(FAO)는 한국을 "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로 극찬하기도 하였다.

 

현 선생은 '산림의 성쇠가 국력의 성쇠와 비례한다', '산 푸르고 못 사는 나라 없다'는 신념으로 '산림부국론'을 주창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우수한 종자 개발과 보급에 힘쓰면서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는 데에도 앞장섰다.

 

일생에 걸친 임목육종의 공로를 인정받아 과학기술인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과학기술유공자에도 지정됐다.

 

그러나, 현신규 선생 외에도 각자의 위치에서 산림부국, 푸른 산을 만들어 가신 분들이 무수히 많다. 어린시절의 기억이지만 지금은 수몰된 소양강자락에 동부영림서라는 정부 조직이 있었다 기억되는데, 나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잠시 보냈었다.

 

이곳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육종과 산 가꾸기에 최선을 다한 분이 계셨다.

 

강원도와 경기도 일원의 잣나무와 낙엽송,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식재와 수목관리를 통해 푸른 산을 만들어 주셨던 이근회 선생이 기억나고, 이 선생은 삼림과 함께 수없이 많은 산속 옹달샘도 찾아 스스로 이름을 붙이시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언제나 맑은 옹달샘 물을 편안하게 마실 수 있도록 스스로 관광보국에도 힘을 쓰셨던 분으로 기억된다.

 

당시 함께 근무했던 직원 분들과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모든 공직자 분들, 그리고 녹화사업에 참여한 시민 모든 분들께 오늘의 푸르름에 대하여 끝없는 감사의 정을 전하고 싶다.

 

이제 세상은 변하여 경제목으로의 전환과 건물의 지붕과 빌딩에도 도입되는 과학적 녹화사업이 진행중이다.

 

4월을 맞아 헐벗었던 시절의 산천과 지금의 산천을 돌아보면서 십년지계가 10번은 더 반복되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터전이 더 푸르러 지면 좋겠고, 과학적 산림녹화사업이 필요한 다른 나라로 우리의 산림기술이 전수되어 언제나 푸르고 푸른 이 지구상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머물기를 기원해 본다.

 

 

이세훈 논설위원(경제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