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칠의 대가 무형문화재 칠화장漆畵匠 제1호 청목 김환경

전통 채화칠기의 복원과 창작을 통한 연구

                                           

무형문화재 제1호 칠화장漆畵匠 보유자인 청목靑木 김환경金煥京 재단법인 청목문화재단 이사장은 평소 소탈한 모습을 하고 있는것이 매력으로 꼽힌다. 60년이 넘는 세월을 한결 같이 옻칠연구에만 몰두해 왔다. 그리하여 무형문화재 제1호 칠화장이란 타이틀을 보유한 우리나라 칠화장계 최고의 대가이다.

 

칠화란 옻칠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즉, 옻나무에서 옻을 채취하여 정제한 후 천연연료를 옻칠과 배합하여 색칠을 만들고, 이 색칠을 기물에 칠하여 무늬를 시문하는 것을 말한다. 칠화의 기법으로 표현한 작품을 채화칠기라 한다. 채화칠기의 특징은 옻칠과 안료의 배합으로 화사하면서도 은은하고 중후한 아름다움을 뽑내고 있다. 그러나 작업상 매우 까다롭고 색칠을 만드는 과정 또한 오랜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이므로 투철한 장인정신이 필요한 분야이다.

 

청목선생은 1975년부터 채화칠기를 시작했다. 70년대만 해도 나무에 옻칠을 하고 조개를 납작하게 갈아 십장생 등의 한국적 문양을 붙여 만들었던 가구나 주방용품의 제작을 쉽게 볼 수 있었다. 30~40년 전 결혼 준비를 할 때만 해도 집집마다 안방에는 옻칠만 한 장롱, 경대, 반다지, 삼단장들을 볼 수 있었고 자개장이라고 불렀던 나전칠기장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외국 브랜드의 가구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와 집단으로 가구판매의 거리들을 형성하고 있었다. 옻칠만큼 과거부터 우리 생활에 밀접했던 칠은 없었다. 가구는 물론이고 밥상, 구절판, 다기와 쟁반 같은 생활용구 제작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였다.

 

궁궐이나 사찰에서 형형색색의 단청이나 천장, 사천왕문 등을 그리고 칠할 때도 의당 옻칠을 썼다. 지금은 북백이 가구들의 선호가 대세를 이룬다. 지인들이 집을 꾸미기 위해 인테리어 옻칠 소품들을 장만하나 가구를 구입하지는 않는다. 청목선생은 일본의 식기 문화를 예로 들며 안타까움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식기, 접시, 도시락, 수저 젓가락까지 옻칠을 한 제품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왜? 그들은 젓가락 하나에 까지도 옷칠을 입히는 것인가?'이유는 건강에 좋다는 것이었다. 옻칠 위에 색옷칠로 문양을 그리는 것을 채화라고 한다. 채화의 우리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가 이제는 마치 그들의 문화인 것처럼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청목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채화칠기를 재현하기 시작했고 이를 지켜본 칠 공방을 하시던 김성갑 선생 그리고 운보 김기창 선생이 자신을 키워주신 분들이시다. 그들에게 사사를 받으며 얼마나 열정을 쏟았더니 운보 김기창은 훗날 청목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청목은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열정과 예술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듬뿍 지닌 사람이다. 단순히 생각해볼 때 나의 작업과 청목의 채화칠기 작업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재료를 준비하고 작품의 주제를 설정하고 이것이 하나의 작품이 되기까지 수많은 과정과 혼신의 힘은 지극히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노력할 줄 아는 사람, 장인정신이 가슴 절절히 스며있는 공예가, 작품 제작을 위한 식지 않는 열정,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 등 나열하자면 너무나 많은 정신과 사상이 담긴 사람이 바로 내가 아는 청목 김환경이다.”

 

운보 김기창화백도 청목에게 찬사를 보냈다. 장인匠人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또 있을까. 청목은 스승에게 사사하며 독창적인 기법을 창작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목은 왜 혼신의 힘을 다했을까? 그에게 열정을 불어넣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칠기의 역사와 함께 1979년 ‘한국 나전칠기보호육성회’와 함께 한 일본 방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옻칠을 공예재료로 쓰기 시작한 것은 BC 3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충남 아산 남정리의 청동기시대 말기 유적에서 칠막이 발견되었고, 경남 의창군 목관묘에서 20여 점의 무문칠기가 출토됨에 따라 이미 기원전에 칠기를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채화칠기는 발전을 이룬다. 경주 천마총의 벽화나 백제 무열왕릉 출토 채화유물 등은 세계적인 보물이다. 조선 시대에도 사군자나 길상을 상징하는 각종 문양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으나 목기를 사용하다 보니 나전칠기에 점차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그 후 일제 강점 시대를 거치며 나전칠기가 번성하며 채화칠기는 자연스럽게 잊히게 되었다.

 

                                                 옻칠의 산업화를 꿈꾸는 청목선생

                                                칠예를 통해 새롭게 탄생시키고 싶다.

 

옻은 지역에 따라 그 색(色)이 다르다. 韓, 中, 日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서는 황색을 띠며, 아프리카 같은 더운 지역에서는 고무 성분이 들어가 검은색, 그리고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는 흰색으로 거주 인종의 피부색과 묘하게 일치한다. 그중 우리나라가 속한 동북아의 옻을 최고로 치는데, 한반도의 경우 평북의 태천泰川과 강원도 원주原州의 옻을 상품으로 친다.

 

청목선생은 일월도를 응용한 12자 장롱을 출품한다. 전체적인 구도나 구성에서 기존의 장롱의 개념을 혁신한 벽화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장롱이기 전에 벽화와 같은 장식적인 효과를 얻고 있는 것이다. 십장생도는 민화적인 소재 및 구성, 그리고 형태 해석은 물론이려니와 그 세련된 조형미에서 청목이 도달한 칠예의 결정체라고 할 만 하다. 십장생도 장롱은 옻칠 그림이 일반적인 채색화에 비해 비록 그 채색의 화려함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깊고 그윽한 맛은 채색화에서 맛볼 수 없는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이해된다.

 

청목은 이 같은 점에 착안, 이 시대를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의 작품을 모화母畵로 한 칠회화 작품을 재현했다. 그 결과 운보의 실제 작품과는 다른 또 하나의 높은 격조를 지닌 작품성을 부여한 것이다. 유럽의 고전 동판화가 각사刻師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듯이 운보작품 또한 이 시대의 뛰어난 칠예 작가 청목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 청록 산수를 비롯하여 화조, 문자, 추상 등이 자연스럽게 고색과 고태古態가 깃든 칠예를 통해 새롭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새로운 회화 작업은 칠예의 표현영역 확장이란 점에서 청목자신을 포함하여 국내 칠예계의 미래를 예견케 한다. 청목은 매번 개인전을 할 때 마다 칠회화 작업에 심혈을 기울여 칠예의 새로운 전통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기회가 오면 대형 벽화 작업으로 칠회화 고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리라고 한다.

 

청목의 작품은 영국 여왕 등 전 세계 유명인들이 소장하고 있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지만, 원하는 그림으로 채화칠기 작품을 만나려면 길게는 1년까지도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옻나무에서 옻을 채취해서 그림의 재료가 되는 과정을 채취업자의 도움을 받는 경우 시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 그 후로도 수작업의 복잡한 과정을 밟아야 하며 작품에 따라 칠과 건조를 6~12회 반복해야 하므로 고가高價일 수밖에 없으며 일부만 그 아름다움을 누릴수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 설명한다.

 

옻칠 제품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동의보감, 본초강목, 향약집성방 등에 나타난 것만 봐도 항암, 항균, 항산화, 항염증, 살충 등 신비한 효능이 많고 현대에 와서도 전자파차단, 아토피 치료 등 그 효능이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으므로 그릇, 휴대전화, 가방 등 삶의 전반에 사용하도록 산업화하여야 한다고 청목은 주장한다. 산업화는 초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 비용이 들지만, 대기업에서 관심을 갖고 대량생산의 통해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전통문화를 되살린 청목 김환경 무형문화재의 노력이 옻칠 제품의 산업화로 이끌 수 있을지 기대된다.

 

 

 

외교저널(Diplomacy Journal) 이존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