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길위의 소중한 인연

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세훈 논설위원 | 추위가 강풍과 함께 엄습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낙관보다는 퇴행과 절망이라는 경제현실이 서민들에게는 더욱 더 고단함을 더 느끼게 하고, 차가운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건설회사들은 PF로 국내 주택시장에서 몸집을 부풀리더니, 미분양에 한숨짓고 있고, PF를 집행한 금융기관도 채권회수에 제동이 걸리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예대마진으로 최대 이익을 낸 은행권을 포함한 여타 금융권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화두는 배제한채 여전히 낙후된 금융시스템에 의존하면서 서민 가계와 기업으로로 부터 담보위주의 안전한 돈 놀이에 혈안이 되어 금융권 최대 수익창출에 힘을 기울이다 보니, 소위 황제세라는 목적세제의 국회 발의가 가시화 되어 가고 있는 시점에서도, 보다 더 혁신적이고, 시장중심적인 금융시스템 구축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한동안 몸이 아프더니 2주일 이상 모든 음식을 제 자신의 몸이 스스로 음식을 거부하는 사단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아름다운 오색단풍과 습도도 낮고, 선선한 가을 날씨를 채 느낄 사이도 없이 가을이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누워 있어야 하는 고통속에서 오랫동안 두통과 함께 찾아온 제 몸은 오한으로 아픈 날들이 회복되지 않고 계속 이어만 졌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이 혼자사는 사람의 경우, 고독사의 원인중 하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몸이 아프니 어떠한 생각도,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2주이상의 시간이 지나고, 체중이 10여킬로 빠지더니 스스로의 자정능력에 힘입어 서서히 오한과 두통이 사라져 갔습니다.

 

쇠약하진 몸을 조금씩 단련해 정상을 향해 조심스레 가다보니 10여년전 길 위에서의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떠올랐습니다. 요즘처럼 세상이 시끄럽고, 소란스러울 때는 이 분들이 가진 따뜻한 마음과 진심어린 사고와 누구에게나 진정인 행동을 돌이켜 보면서 이 분들로 부터 마음의 위안과 조용한 기쁨을 선사받고, 함께 누리게 되는것 같아 마음이 즐겁기 까지 합니다.

 

 

첫번째 소중한 길위의 인연은 연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라남도 무안은 화산지 등이 있는 우리나라 연꽃 주산지 중 하나입니다. 한국학 사전에 의하면 연꽃은 연못에서 자라는 식물인데 논밭에서 재배하기도 하며, 뿌리가 옆으로 길게 뻗어 나가고, 원주형으로 마디가 많으며 가을철에 끝부분이 굵어진다. 잎은 근경(根莖)에서 나와 물위에 높이 솟고 원형에 가까우며 백 녹색이고, 엽맥이 사방으로 퍼지며 지름 40㎝ 정도로서 물에 잘 젖지 않는다. 엽병(葉柄:잎자루)은 원주형이며 짧은 가시 같은 돌기가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꽃은 7, 8월에 피고 지름 15∼20㎝로서 연한 홍색 또는 백색이며, 화경은 엽병처럼 가시가 있고 끝에 1개의 꽃이 달린다 하였고, 꽃받침은 녹색이며 일찍 떨어지고 꽃잎은 길이 8∼12㎝, 너비 3∼7㎝로서 도란형 둔두이며 화탁은 크고 해면질이며, 길이와 지름이 각각 10㎝로서 표면이 평탄하고, 열매는 타원형으로 길이 2㎝ 정도로서 먹을 수 있다 합니다. 원산지는 인도로 연은 따뜻한 지역에서 주로 자랍니다. 과거부터 연은 더러운 연못에서 깨끗한 꽃을 피운다 하여 사찰이나 선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꽃이기도 합니다. 

 

주무숙(周茂叔)은 <애련설 愛蓮說>에서 “내가 오직 연을 사랑함은 진흙 속에서 났지만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이 소통하고 밖이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가 없다고 표현하고,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으며 우뚝 깨끗이 서 있는 품은 멀리서 볼 것이며, 연은 꽃 가운데 군자라 한다.”고 하며 연꽃의 덕을 찬양하고 있고, 불교에서는 연꽃이 속세의 더러움 속에서 피어나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상징한다고 하여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꽃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극락세계를 달리 부를 때에 ‘연방(蓮邦)’이라고 한다든지,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는 사람의 모습을 ‘연태(蓮態)’라 표현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처가 앉아 있는 대좌를 연꽃으로 조각하는 것도 이러한 상징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민간에서는 종자를 많이 맺기에 연꽃을 다산의 징표로 보았고, 부인의 의복에 연꽃의 문양을 새겨 넣는 것도 연꽃의 다산성에 힘입어 자손을 많이 낳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10여년전 저의 길 위의 소중한 인연으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남 무안 출신으로 지금은 함평에서 농업회사법인을 경영하시는 임명란 대표님과의 이야기입니다. 임대표님은 함평에 수십만평의 저수지와 그 저수지 수변을 이용하여 연을 재배하셨고, 연재배 초기에는 연의 수요와 공급이 일정하지 않아 초기에는 어려움도 있으셨으나, 지금은 점차 개선되었다 알고 있습니다. 

 

 

10여년전 어느 날, 무안이나 함평의 연을 우리 철원으로 시집 보낼까요? 라는 제안을 나는 임대표님께 하게 되었다. 강원도 철원에는 철원군 동송읍 오덕리에 위치한 학저수지가 있는데, 강산리, 중강리, 하갈리 등의 협곡에서 유입하는 수자원으로 1921년 일제시대때 철원군민의 부역으로 인공 저수지가 만들어 졌고, 광복 이후에는 중앙농지개량조합이 보수 확장한 저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한국농어촌공사 철원지사가 관리중이나, 5급 용수로 오염된 상태라 농업용수로도 사용되지 못하는 저수지가 있는데, 인근에는 도피안사라는 사찰이 있고, 도피안사는 도선국사가 신라 경문왕 5년(865)에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라는 부연설명을 드렸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온난화의 영향으로 따뜻한 남쪽에서 주로 자생하는 연이 철원 같은 북쪽지역에서도 자생 가능한지 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이 저수지에 연을 심어 저수지의 농업용수도 정화하고, 매년 피고지는 연꽃을 통하여 무안이나 함평까지 가지 않고도 수도권 시민들이 수도권 가까이에서 연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씀드리니 우리 철원에 한번 가 볼까요?로 시작하여 우리는 이내 학 저수지 전체면적중 약 3만평내외의 수면을 한국농어촌공사 철원지사에서 임대하여 연을 식재하기에 이르렀고, 10여일의 식재기간중 저수지 상류에서 흐르는 물을 저수지내로 흐르지 못하도록 흙막이 뚝을 만들어 막아 놓았었으나, 밤새 뚝이 무너져 새로 구입한 포클레인 한대가 물어 잠기는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누구의 도움도 없이 수억원이 넘는 비용을 자비로 부담하며 우리는 연꽃을 대량으로 식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식재 이후에는 한번정도 학 저수지를 찾아 가 보았을 뿐, 철원군의 자산으로 생각하며 오랫동안을 잊고 지냈는데, 며칠 전 철원에 사는 한 지인으로부터 학 저수지 주변에도 연 밭이 더 형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로서 관광자원화가 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오른 손이 한 일은 왼손도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 있듯이 누군가를 위하여 하는 일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님을 저는 이 일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단 한 번도 연을 직접 심어 보지 못하였다는 임대표님은 허리까지 차는 저수지에서 연을 직접 심으셨었고, 인근 부대의 장병들은 대민봉사활동으로 저희의 간곡한 도움요청으로 연 식재 작업에 수십명의장병들이 큰 도움을 주셨었는데, 이제 세월이 한 참 지나고서야 비로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게 됩니다. 이때 도움을 주신 육군 장병들은 이제는 30대 중반의 청장년이 되었을 것이고, 언제나 지금도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자연을 깊이 사랑하고, 고향을 지키며,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헌신과 사랑을 기꺼이 내어 주시는 임대표님의 따뜻하고 잔잔한 인성에 이제야 깊은 존경을 드리게 됩니다. 연을 심어 놓고도 10여년 왕래가 없었으니,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로 스스로 위로를 해보며, 철원군의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연을 이용한 각종 신선 제품과 식품재료들로 이 지역 지역경제에도 일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두번째 소중한 길 위의 인연은 혜문이라는 승려의 이야기입니다.

 

혜문(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은 조계종의 유명 승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국문학 석사과정을 이수한 문학도였으며, 처음 만난 인상은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음성이 크고, 매우 맑은 분으로 기억됩니다. 혜문은 일제 강점기 등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외부에 불법 반출된 문화재 환수 운동에 앞장서온 시민운동가이기도 합니다. 조선왕실의궤, 대한제국 국새 등이 그의 노력으로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습니다.

 

수 년전  혜문은 더이상 승려가 아니라고 스스로 선언하고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환속이라는 표현보다는 금경경에 나오는 “환지본처”라는 말로 자신의 제 자리를 찾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혜문이 승려시절 이었던 10여년 전으로 우리들의 길위의 인연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 갑니다.

 

혜문은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조계종 25교구)에 적을 둔 승려 였으며, 불경간경을 주도하신 월운 큰 스님을 모시고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그 이후, 혜문은 지난 10여년 이상을 우리의 빼앗긴 문화재 환수운동의 선두에 서 왔고, 2006년부터는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로 부임하여 일하고 있으며, 2006년 일본 도쿄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47권) 환수부터 2011년 일왕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실의궤>(1205권) 환수까지 혜문이 관여하지 않은 문화재 반환운동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 때 가져온 대한제국 국새 역시 약탈 문화재라는 사실을 밝혀내어, 반환이 이루어 지게된 것 역시 혜문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혜문은 단순히 우리 것이니까 돌려 달라고 하기보다 자료를 통해 언제 어떻게 약탈되었는지를 밝힌 뒤 지성과 양심에 호소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지금까지 50개가 넘는 문화재 관련 사업을 진행한 그는 열정적인 시민운동가이자 대중적으로 가장 친숙한 불교계 인사 중 한명이었습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혜문은 2012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하기도 했고, 아마도 이때를 전후하여 봉선사 말사인 포천소재 사고사찰에서 주지역활을 하는 혜문을 저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혜문은 당시 상금으로 받은 금 10여돈을 녹여 황금 밥솥을 만들었다 하셨고,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황금 밥솥에서 밥을 지어 함께 공양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늘 누군가의 어려운 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일에 진심이었고, 수도생활을 하고, 공부하는 승려이전에 따뜻한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 역시 간촐했지만 황금 솥에서 지어진 황금 밥 공양을 혜문스님과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다.    

 

2010년 1월 시점을 전후하여 혜문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지하에 일제강점기 기생의 생식기와 민족종교의 하나인 백백교 교주의 머리가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주변에 자주 이야기 하고는 하였습니다. 지극히 비인도적 처사라는 점을 크게 강조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생식기는 여성의 상징인데, 빨리 처리해서 영혼이라도 편히 쉬게 해주고 싶다는 의견이었고, 당시 국과수측 의견은 “지금까지는 역사적 의미 때문에 함부로 폐기할 수 없어 비공개로 보관하고 있다는 입장이었으며, 처리 방법에 대해서는 적절한 관련 규정이 없어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는 입장이라 하였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지하 부검실에 보관된 생식기 표본의 경우, 일제는 왜 명월관 기생의 생식기를 적출했고, 주인이 누구이기에 이런 비참한 모습이 되었던 것일까? 하는 궁금증을 갖고 정확한 내력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그 전말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국과수 자체의 기록도 전무했기에 혜문은 여러 궁금증을 풀기 위한 직접적인 원인 추적에 나서게 됩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했던 기생집은 ‘명월관’이었습니다. 1909년 대궐 궁내부 주임관과 전선사장으로 있으면서 궁중 요리를 맡았던 안순환이 서울 종로(지금의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 2층 양옥에 ‘명월관’ 간판을 내건 것이 시초가 됐다고 합니다. 같은 해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궁중의 기녀들이 대거 명월관으로 몰려들면서 장안의 명소가 되었고, 명월관에는 주로 고관대작이나 친일계 인물들이 자주 드나들었으며, 문인과 언론인들도 출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이후, 1918년에 대형화재가 나면서 불에 타 명월관은 소실되었습니다.

 

명월관에는 ‘명월’이라는 기생이 있었고, 전해지는 말로는 이 기생과 동침을 한 남자들이 줄줄이 복상사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기생이 사망한 후 일제가 인체 연구용으로 성기를 적출해 포르말린 용액 속에 넣어 보관하게 되었다 합니다. 사망 당시 30대로 알려진 이 기생의 사망 원인 역시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2003년 11월에 개봉된 강수연 주연의 영화 ‘써클’이 국과수에 보관되어 있는 기생의 생식기와 기생 “홍련”을 모티브로 한 영화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와 관련성이 있으리라 추정해 봅니다.

 

'시사저널'은 제1057호(2010년 1월26일자)에서 ‘국과수에 웬 70년 전 죄인 머리가…’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국과수 지하 부검실에 동학으로부터 파생된 민족종교인 ‘백백교’ 교주의 잘린 머리와 ‘명월관 기생의 생식기’가 수십 년 동안 보관돼 있다는 최초의 보도가 있었고, 이로 인해 약 70여 년 동안 숨겨졌던 반 인간적이고 비정한 역사적 사실이 만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기사가 보도된 날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서울중앙지법에 ‘여성 생식기 표본 보관 금지 청구의 소’(2010가합 4894호)를 제출하고, 국과수에 보관된 인체 표본을 ‘인도적 차원’에서 적절히 조치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종교계와 여성계에서는 명월관 기생의 생식기를 당장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고, 강보향 불교여성개발원 108인회 부회장은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오는 여성의 생식기를 지금까지 국과수가 보관하고 있는 것자체가 문제라 지적하면서, 이 여성의 신체 표본은 남성적 시각에 입각한 성적 쾌락이나 성적 호기심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명월관 기생은 비참한 시기를 살다 간 슬픈 여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이 여성의 생식기 표본을 매장하거나 화장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후, 법원은 여성의 생식기 폐기와 민족종교인 백백교 교주의 잘린 머리에 대한 폐기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폐기 결정후, 국과수에서 법원 재판부의 현장검증이 있었는데, 국과수측의 안내를 받아 법원 담당 판사와 원고인 혜문 대표와 시사저널의 기자가 지하 부검실에 들어가 생식기 표본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혜문 대표는 기생 생식기 표본을 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께 1m쯤 되는 두꺼운 차단문을 4개나 열고 들어가자 큰 냉장 보관기가 있었다. 문을 열자, 안은 다시 4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맨 위쪽 칸을 열어 젖히자 그곳에 명월이 생식기라고 불리는 표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문은 국과수 측에서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는 반쯤 넋이 나가 저게 뭔 지 형체조차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전합니다. 사실 막연히 주먹 정도 되는 크기의 표본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참관하고 있었고, 그냥 장기 하나를 떼어낸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실물을 보니 축구 공 만한 크기였다고 합니다. 표본은 피부의 탄력이 남은 젊은 여성의 둔부와 생식기를 완전히 오려낸 상태였고, 나팔관까지 이어지는 자궁까지 그대로 도려 내어져 있었으나, 아마 외과의사가 절단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고 생각했다 합니다. 외과의사가 신체를 절단했다면, 절단면이 저렇게 너덜너덜하게 도려내지는 않았을 것이라 판단했는데, 이는 아마도 비전문가이거나 일반인이 칼로 도려냈기 때문에 절단면이 깨끗하지 않았다고 혜문은 회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전문가는 아니지만 해부방식이 연구용, 자료용은 절대 아닌 걸로 보인다는 의견을 제기하였고, 연구가치가 있어 보이지도 않은 문제라 진단하였습니다.

 

다만, 일제 경찰이 만들어 놓은 만행과 자료였기 때문에 폐기되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것 같다.”는 의견과 함께 일제의 조선여인에 대한 만행의 상징이었음에도, 해방 후 우리는 그것을 마치 연구 표본인 것처럼 그대로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장검증후 법원은 명월의 생식기를 파기하라고 판결했으며, 2010년 6월 14일 국과수는 서울고검의 지휘를 받아 용역업체에 의뢰해 여성 생식기를 폐기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최초 기사가 보도된 지 약 5개월 만에 70년간 이어져 온 일제의 만행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존업성을 다룸에 있어 혜문은 단순히 기사를 쓰고, 소송을 내는 데에서 이야기가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생식기의 주인이 정확히 누구인지를 밝히기로 했고, 그녀의 원혼을 천도하는 재도 지내기로 했습니다. 취재 기자와 혜문대표는 당시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일본화가 이시이 하쿠테이 (石井柏亭, 1882-1958)를 주목했습니다. 이시이는 우리나라 근대 화가의 선구자인 이중섭 선생의 스승으로도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1918년과 1921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 각지를 돌며 주로 인물화를 그렸고, 이시이와 명월관 기생 ‘홍련’이 사랑에 빠졌었다는 일화는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혜문과 기자는 오랜 탐문 끝에 일본 하기시 마쓰모토 시립미술관에 이 여인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다음해인 2010년 4월 8일 이 그림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마쓰모토 시립미술관 측은 특별관람실에서 기생 ‘홍련’의 실물 그림을 공개했습니다. 그동안 막연하게 ‘명월관 기생’ ‘기생 명월이’로 불리던 국과수 지하실에 있는 기생 생식기의 진짜 이름과 얼굴을 비로소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림 속 주인공의 이름은 ‘홍련’(紅蓮)이었으며, 그림의 배경으로 볼 때 홍련의 방에서 그린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림 속의 홍련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함께 같던 일행이 일제히 ‘와’하는 감탄사를 자아냈을 정도였지만, 얼굴 표정은 어둡고 슬펐으며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했다고 합니다. 당시 명월관 최고의 기생을 상징하듯 왼손에는 금가락지 세 개를 끼고 있었고, 옷고름에는 금 노리개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서 국과수 생식기의 주인과 명월관 기생 홍련이 상당히 부합한다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1918년에 그려졌고, 1918년은 이시이가 조선에서 활동한 시기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였고, 이 당시 최고의 기생집이 바로 ‘명월관’이었습니다. 1909년에 개업한 명월관은 1918년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일본과 조선의 고관대작들이 자주 들렸던 곳입니다. 당시 명월관의 최고 기생은 ‘명월이’로 알려진 바로 생식기의 주인공입니다. 또한 국과수에 보관 중인 생식기의 상태 등으로 볼 때, 이 기생의 사망 시점도 30대로 추정되었기에 명월관 최고 기생이었던 ‘생식기의 주인공’과 ‘홍련’이 동일 인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성립되었습니다.

 

혜문은 비로서 “여러 정황을 수집하고 자세히 살펴 국과수에 보관중인 생식기의 주인공과 홍련은 동일 인물이 확실하다”고 밝힙니다. 마쓰모토 시립미술관 관계자는 “이 그림은 1954년에 이시이 선생의 가족들이 마쓰모토 박물관에 기증했다가 2002년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옮겨왔다고 이야기하며, 지금까지 이 그림을 보러 온 한국인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2010년 8월 24일 남양주 봉선사에서는 수십 년간 구천을 떠돌던 조선 여인 ‘기생 명월(홍련)’의 천도재를 지내게 됩니다. 우리가 일본에서 찾아온 홍련의 실제 그림을 영정으로 사용했으며, 이로써 수십 년간 구천을 떠돌던 조선 여인 ‘기생 명월이’의 영혼도 편안한 안식처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 저 역시 혜문과 마주 앉아 담담하게 지난 일들에 대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혜문과 이를 파헤친 기자의 탐구심과 함께 인도적 차원의 따뜻함과 일제의 만행에 맞서는 용기 그리고 고운 심성이 지금도 제 마음에 와 닿고 있습니다.

 

혜문은 1998년 출가한 뒤 조계종이 승려가 되기 위해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절차를 이수하지 않았다합니다. 조계종 누리집의 승려 교육 과정에는 ‘출가 뒤 6개월간 행자 수련기간을 거쳐 사미(남자), 사미니(여자)가 된 다음 4년간의 승가대학 과정을 거쳐 비구(남자) 250계, 비구니(여자) 348계를 받아 정식 승려가 된다’고 게재돼 있는데, 혜문은 비구계를 받지 않았으니, 그 이유가 뭔지 물었었습니다. 이에 혜문은 “존경하는 노스님(월운) 곁에서 매일같이 방 닦고 옆에서 공부하고 그런 게 좋았다고 답하면서, 어디 가라고 해도 싫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앉아 있는 그곳에서 수행을 통해 세상이 열리는 것이지, 어디 가서 스펙을 쌓는다고 세상이 열리는 게 아니라는 건방진 생각을(웃음) 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어렸을 때니까, 나중에 어르신들이 특별 비구계를 주려고 많이 노력하시긴 했는데 스스로 거절했다면서, 대중에게 존경받는 스님들 가운데에서도 비구계를 받지 않은 분들이 많다고 전하였습니다. 논어에 나오는 "군자불기"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데, "군자는 결코 그릇에 담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의 틀에 맞추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걸 찾고 그 길을 따르며 살고 싶다.”는 의미였기에 비구계를 받지 않은것 같습니다.

 

암튼, 비구계 없이 승가에 입문하여 선방에 들어간 3년간 혜문은 광인(미치광이)이 되었다 합니다. 사람을 패기도 하고 횡설수설하기도 했는데, 불경을 읽으면서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전합니다. 봉선사 월운 스님이 혜문의 스승인데 그런 때일수록 불경을 읽으라 했다고 전합니다. 그 이후, 회암사에 앉아 3년간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부처님의 설법을 살폈고, 부처님이 49년간 편 일대시교(一代時敎: 부처가 열반할 때까지 전한 가르침)를 3년간 다 보고 나니, 2004년께 광증이 걷혔다 합니다. 그 이전에는 금강경이나 원각경 같은 불경을 읽어도 이해가 도무지 안 됐는데 그때 비로서 이해가 됐다 합니다. 

 

암튼, 스님이 되기 전까지 불교에 관심이 없고, 절에 가본 적조차 없었다는 혜문은 대학시절에 사학을, 대학원 시절에 문학을 공부한 인문학도 였으며,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절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운명의 끌림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중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 그때 그의 나이는 25살. 이후 그는 봉선사를 찾아가 중으로 사는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합니다. 스님이 되기 위해서는 행자로서 수련 기간을 거쳐야 하는데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리고 수련과 허드렛일을 하며 머리에 든 ‘먹물’, 즉 속세의 사고관념을 빼낸다고 하는데, 행자의 과정을 거친 후 혜문은 월운 스님의 시자(비서)로 수행하는 것을 시작으로 18년 동안 스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불교의 매력으로 불이(不二)를 꼽습니다.

 

통상적으로 세상은 흑과 백으로 모든 것을 구별하려고 하지만 둘이 다르지 않으며 실제로는 구별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자신이 규정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삶의 가치관으로 ‘무엇을 봐야 하는지’에 대해 강조하며 ‘환지본처’와 ‘파사현정’을 자신의 대의와 실천윤리로 삼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금강경에 나온 문구인 ‘환지본처’는 ‘제자리 찾기’라는 말로 풀이될 수 있는데 각자 자신의 자리가 있으며 그 자리로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파사현정’, 즉 진실의 이름으로 거짓을 깨야 한다는 것이죠.” 이와 같은 혜문의 철학은 승려로써가 아니라 문화재 운동가로서의 삶을 사는 것으로 지금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10여년전 길위에서 만난 두 분의 인간적 따뜻한 온기와 상대를 지극한 마음으로 배려하는 자세, 그리고 주변을 언제나 따스하게 하는 마법같은 힘을 통하여 오늘 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새로이 살아갈 힘과 새로운 방편을 찾고, 어려움 속에서도 늘 따뜻함을 유지할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자주 만나지 못했으나, 이렇게 마음으로 길위의 인연의 소중한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