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자승스님의 입적과 선사들의 열반송

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세훈 논설위원 | 열반송의 사전적 의미는 선승이나 고승들이 열반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총체적으로 담아 후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을 말합니다. 한시의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형태를 취하지만 임종게 역시 형식적이라 하여 남기지 않는 선승들도 있으나, 열반게(涅槃偈), 열반송(涅槃頌), 입적게(入寂偈)라고 불립니다.

 

 

열반송은 속박과 번뇌, 미망과 아집에서 벗어난 적멸의 순간에 직접 전하는 마지막 한 마디이기 때문에 고승의 임종게는 오래도록 세간의 화제가 되고, 불자나 일반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선승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처음으로 내뱉는 오도송(悟道頌)이 비교적 화려하고 비유적인 반면, 열반송은 화려한 언사를 쓰지 않고 비유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 친필로 남기기도 하고, 제자가 받아 적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주 들을 수 있는 열반송중 몇 가지를 소개해 봅니다. 서산대사 휴정(休靜)은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겼습니다.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소중한 열반송중 하나란 생각이 듭니다.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生也一片浮雲起)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라(死也一片浮雲滅)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浮雲自體本無實 )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러하다”.(生死去來亦如然)

 

“천 가지 계획 만 가지 생각(千計萬思量)

붉은 화로 속 한 점 눈송이(紅爐一點雪)

진흙 소가 물 위를 가나니(泥牛水上行)

대지와 허공이 갈라지도다”(大地虛空烈)

 

우리가 기억하는 현대의 고승 중에서는 성철(性澈)스님 역시 열반송을 남기셨는데 마치 자기 죄를 고백하는 듯한 이 열반송은 이후 구구한 해석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성철 스님의 상좌(제자)였던 원택 스님은 “생전 신도들에게 ‘내 말에 속지 마라’고 자주 말했던 것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으라는 스님 특유의 반어법이 담긴 것”이라고 풀이하였습니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生平欺狂男女群)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彌天罪業過須彌)

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活陷阿鼻恨萬端)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一輪吐紅掛碧山)

 

최근 조계종 총무원장을 연임하시고 한국 불교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님 중 한 분이셨던 자승스님의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죽음을 두고 말들이 많습니다. 불교계에서는 소신분양이라 하고, 사회적 언어로는 이를 자살이라 칭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수많은 불자나, 시민사회단체 또는 조계종 내부의 사회적 요구에도 전혀 미동도 안 하시던 분이었으니, 충격적인 사건임은 충분합니다. 더군다나, 요사체를 모두 불태우는 방법으로 소신공양을 하였으니, 지금까지의 소신공양과는 그 결이 달라 보이기도 합니다. 권력의 정점에 오랫동안 계셨던 분이었으니, 자승스님 역시 죽음 앞에서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이 부질없고, 더 이상 구할 것도 없다는 임종송을 남기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조계종이 발표한 임종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사가 없다 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

 

많은 전문가들이 그 의미를 잘 해석하리라 생각이 드나, 생사 앞에서 치열한 고민과 함께 모든 권력을 잡아 본 당신이 비로서 삶의 덧없음을, 더 이상 추구할 가치가 없음을 나타낸 열반송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열반송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우리 삶의 진면목을 남겨 주신 선승들의 게송을 통하여 다시금 우리 삶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실천문학중 하나라 생각해 봅니다.

 

스님들의 마지막 열반송외에도 우리 역사에는 수많은 가르침과 저항을 위한 시들도 많습니다. 그 중에 만해 한용운(1879~1944)은 “님의 침묵”(1926)이란 시집을 발표함으로써 한국 근대 문학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당시 서구의 시를 번안(翻案)하는 형식의 시 수준에 머물던 한국 근대시단에 “님의 침묵”을 발표함으로써 시 창작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은 “유마경”에 나오는 “유마거사의 침묵”에서 유래합니다. 유마의 침묵은 깨달음을 얻기 직전 선정(禪定)의 고요 즉, 삼매이며, 폭풍 전야와 같은 고요와 정적입니다. 선정 삼매 후에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태산을 무너뜨리는 사자후(獅子吼) 설법이 뒤따릅니다. “님의 침묵”은 압제에 꿈적 못하는 침묵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국민이 벼락 천둥처럼 일어나기 위해 마음먹는 준비의 시간이며, 고요이고, 침묵입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으로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3·1운동은 자주적이며, 비 폭력적인 우리 민족독립사의 위대한 쾌거 중 하나입니다. 만약 3·1운동이 없었더라면 우리 민족은 스스로 자주국가임을 부르짖을 줄 모르고, 아직도 일본의 속국으로 살면서 미개한 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자주독립을 외친 3·1운동을 앞장서 지휘한 지도자가 바로 만해 한용운 스님입니다. 민족대표 33인 대표 중에서도 변절한 이들이 있었지만, 끝까지 조국의 독립에 대하여 지조와 절조를 지켰습니다. 이러한 게도송을 우리는 지금도 듣습니다.

 

일본은 반성하지 않는 국가입니다. 반성하지 않는 국가의 미래는 없습니다. 지금의 윤석렬 정부가 자랑처럼 받아들인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는 그릇된 방식이고, 우리민족 전체의 입장에서는 전혀 수용이나, 용서될 수 없는 방식으로 가해자의 뜻에 맞게 일방적으로 종속되고, 굴종적인 해결방안이었기에 미래의 어느 순간 우리는 반드시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금 일본과 이 문제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에서 “님”은 조국이고, “이별”은 일본에게 빼앗긴 조국과의 이별입니다. 만해는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불교의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의 순환 윤회의 진리를 근거로 제시하며 잃어버린 조국을 꼭 되찾을 것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님의 침묵”은 “유마경”에 나오는 “유마거사의 침묵”에서 유래한다고 하였습니다. “유마힐소설경 (維摩詰所說經)>에 한 일화가 있습니다. 유마는 출가하여 스님이 되지 않은 붓다의 재가 제자입니다.

 

어느 날, 유마거사(維摩居士)가 병을 얻어 앓아눕게 되자 문수사리(文殊師利)가 문병을 가서 묻습니다. “거사님, 이 병은 무엇 때문에 생겼으며, 또 얼마나 오래되었고,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겠습니까?”

 

거사는 “어리석음(痴)과 탐심(有愛)으로부터 나의 병은 생겼습니다. 모든 중생이 병들어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만약 모든 중생의 병이 사라진다면 그때 나의 병도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깨달은 안목에서는 누구든, 무엇이든, 고통을 겪는다면 그것은 그 개체에게만 국한된 고통이 아니라 모두의 고통이 된다는 견해를 갖으며,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의존하면서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연기(緣起)”라고도 설명하기도 하는데, 단순히 인과응보를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그 이전에 서로 의존하면서 존재하고 그것은 비단 인간 사이만이 아니라 인간 외에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과거 인간 중심적 사유만으로는 인간과 자연 사이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사유 방식에 관한 문제인데,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고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자연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유마경”은 대승경전 가운데서도 백미로 꼽히는 경전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본래의 제목은 “불설유마힐소설경”으로 재가거사가 설주(說主)인 독특한 형식의 경전입니다. 설주는 상업이 융성하게 일어나고 있던 인도 바이샬리에 사는 유마 거사를 뜻합니다. 경전은 장자이기도 한 유마 거사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에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문병을 당부하면서 시작됩니다. 부처님의 당부에도 수행력과 법력이 재가불자인 유마 거사에 미치지 못한다며 제자들이 모두 문병을 사양하자, 마침내 문수보살이 유마 거사를 만나면서 나눈 대화가 핵심입니다.

 

“유마경”은 “중생이 병들어 아프기에 보살도 병들어 아프다”는 가르침으로 유명한데, 굳이 경전을 읽지 않아도 이 대목만은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마 거사는 “문질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중생들이 병에 걸렸으므로 나도 병들어 있다. 만약 중생들의 병이 나으면 그때 내 병도 나을 것이다.”

 

당시 출가중심주의와 개인의 해탈을 중요시하는 이기적인 수행문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면서 또한 보살의 길을 닦아 중생과 더불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대승불교의 첫 출발을 알리는 사자후였습니다.

 

이런 ‘유마경’의 가르침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지금 있는 이 자리가 바로 불국토라는 가르침입니다. 정토라는 것이 다른 먼 곳에 있는 이상향이 아니라, 지금 마음이 맑고 밝다면 그 자리가 바로 정토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둘째는 자비정신의 실천입니다. 모든 중생들의 병이 나으면 그때 내 병도 나을 것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보살도의 실천이 대승불교 수행정신의 핵심임을 역설했습니다. 셋째는 출가와 재가, 너와 내가 없는 평등한 불이사상(不二思想)의 실천입니다. 출가와 재가가 둘이 아니듯이 보리와 번뇌가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정토와 예토가 또한 둘이 아니라는 불이사상을 체득해야 절대평등의 경지에 들어 완전한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넷째는 일체중생실유불성 (一切衆生悉有佛性)의 사상입니다. 유마 거사는 “일체의 번뇌가 곧 여래의 종성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말은 곧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으며, 또한 중생이 있어야 부처가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유마경”의 핵심 가르침인 불이법문(不二法門), 즉 둘이 아닌 진리의 문은 재가자와 수행자를 나누고, 더러운 속세와 청정한 불국토를 나누는 것은 현재의 진영논리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연꽃은 진흙에서 피어났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는 격언을 당연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유마 거사의 시각에서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며 분별입니다. 생각을 돌려 “연꽃은 진흙 속에서만 피어난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이 불이사상이며 또한 바른 견해입니다. 진흙(속세의 삶)이 없다면 연꽃(깨달음)도 피어날 수 없다는 역설을 통해 화합과 포용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승스님은 열반송으로 “생사가 없다 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 라고 하셨습니다. 생사가 절대 다르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나와 죽은 내가 다를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인연을 뒤로 하고 떠나가는 겁니다. 이생에서의 삶은 마감되겠지만, 또 다른 세상에서의 삶은 또다시 시작되리라 봅니다. 저 역시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금년에만 해도 5명의 동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은 그들의 일이 였으나, 내일은 살아 있는 우리들의 일이 됩니다. 우리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선사들의 가르침대로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곳이 정토이며,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믿음에서 우리네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열반송은 시대의 가르침이며, 우리 삶 전체를 꿰뚫는 진리입니다.

 

권력에 눈멀고 자신만이 우리 국민을 위하여 헌신하고,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스스로 정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아주 작은 이념의 틀속에서 국민들을 나누고 억압하려는 집권세력이나, 그들이 주장하는 이분법으로 너와 나를 가르는 분별의 정치는 곧 “필망”입니다. 11월 15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기간에 만나 미중간 군사 소통 채널을 복구하기로 했습니다. 대만 문제 등에 대해서는 시각차를 보였지만, 일단 두 정상이 군사 충돌 가능성을 줄였다는 점에서 전 세계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와 함께 발빠른 일본 역시 중국과 일본의 현안문제에 대하여 대화를 재개하였지만, 유독 대한민국 대통령은 3분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눈 인사만을 하였습니다.

코로나 이후 중국은 매우 불안한 상태입니다. 부동산 버블과 경기 침체가 우려되고 있고, 경제 구조조정의 숙제 역시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 해소를 위하여는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합니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로, 재선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우크라이나와 중동, 두 개의 전선 위에서 홀로 고군분투 중입니다. 중국을 대하는 미국 정가의 전략이나 생각은 매우 복잡하지만, 바이든 입장에서는 중국과의 갈등이라는 불확실성을 해소하여야만 합니다. 양국 정상은 이런 자신이 처한 현실과 배경 위에서 최소한의 대화 재개에 합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미일에 올인하는 외교전략구사로 세계 어느곳도 갈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미중 관계에 온기가 돌자, 한국의 대통령 역시 몸이 달기 시작하였으나, 상대는 아주 냉담하기만 합니다. 한중 정상회담을 꽤 공들여 추진했으나, 시진핑은 일언지하에 '패싱'해 버립니다. 중국은 미국을 방문할때, 한국을 담당하는 외교부의 고위직을 대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시진핑 입장에서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 관리만 제대로 하면 따로 챙기지 않아도 될 '하위 변수'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국은 어차피 미국을 따르게 돼 있고, 외교적으로 자주국가라 하지만, 이 정부 들어 미국중심의 위성국가가 된지 오래니까 누구라도 예측 가능한 개연성이 존재한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외교가 대미, 대일 외교에 '올인'한 윤석열 외교의 현 주소가 다극화의 현장인 외교무대에서 지금 미일 당사국은 물론 주변국으로부터 모두 패싱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일본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은 30%이고, 영국 수낙총리의 지지율 역시 25%입니다. 앞으로도 이들의 지지율은 계속 하향화 할것으로 추정됩니다. 지지율이 낮은 정상들과 외교정상회담을 잇따라 진행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내각제하에서는 내각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그들은 정책을 바꾸기도 하고, 폐기하기도 하며, 정치현장에서 퇴장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은 국제질서의 변화와는 반대방향으로 전 방위적으로 외교적 역주행을 더욱 가속화 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신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해소하기 위하여 훈풍을 불어 넣으려 시도하고 있는데 한국은 인접한 북한과 관계에서 역시 '적대 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있습니다. 무력도발에는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발언과 함께 전선 곳곳에서 군사적 대결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군인은 싸우는 것이 임무입니다. 이들은 국민을 위험에 빠지게 하고, 담보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국방부 장관이나 군장성들이 싸움을 서슴지 않을때 외교무대에서 만은 긴장을 완하할수 있는 방법을 택하여야 합니다. 북한이 군사정찰위성을 발사한 것을 이유로 11월 22일 9.19 남북군사합의 효력을 일부 정지했고, 북한은 이를 기회로 곧바로 GP에 병력과 중화기를 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발적 군사 충돌 가능성이 높아졌고, 중동에서조차도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24일 일시적으로 휴전했고, 휴전연장을 위한 협상을 하는 행위와도 다른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모두들 최소한 '출구'를 모색해보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한반도에서만은 군사 긴장이 고조되는 건 우크라이나 전선과 중동 전선에서 길을 잃고 있는 미국에게도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란 판단도 해봅니다. 그런데 윤석열식 외교는 막가파식 '적대 정책'을 강화합니다.  9.19 합의 파기라는 중대한 결정으로 내달리고 있는 가운데 국정원장과 핵심 포스트의 간부들이 해임되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권 출범 2년이 안된, 대통령의 권력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국정원에서 두 번의 인사 파동이 났고, 북한과 대결 구도를 확립하려고 전임 정부에서 만든 '평화 협정'을 스스로 파기하고 있는 와중에 세 번째 인사 파동으로 국정원장을 날리는 게 이 정부 외교 안보팀의 실상입니다.

 

지금 한국의 외교는 그 어느때보다 '정상 외교'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내치가 야당과의 협력이 불가능한 상태로 계속 지속되니 외치라도 잘해야 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로 보입니다. 그러나,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새지 않을리 없습니다.

 

대통령실도 그렇고 지지자들도 '대통령의 외교'를 잘 하는 분야로 소개합니다. 정상외교에 어느 정도 진심이냐 하면, 지난 9월 유엔총회가 열렸던 뉴욕에서 5일간 47개국 양자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왜 정상 외교에 그렇게 집착할까요? 국내 정치에서 새겨진 무능한 이미지를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입니다. 정상외교는 화려하고, 최소한 '환대'를 깔고 진행됩니다. 그런, 그 환대가 진심인 경우는 없습니다. 대통령이 영업사원 1호라면서 한국으로의 외자유치는 겨우 10조원인데, 해외투자는 105조로 10배의 순 자본유출이 있는데, 이정도면 해당투자국에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번 엑스포 유치 실패는 외교 실패의 책임 소재가 분명합니다. 부산 엑스포 유치에 실패한 후 대통령은 "저 역시도 96개국 정상과 150여차례 만났고, 수십개국 정상들과 직접 전화 통화도 했지만, 민관에서 접촉하며 저희가 느꼈던 입장에 대한 예측이 많이 빗나간 것 같다"며 "이 모든 것은 전부 저의 부족"이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모든 게 대통령 탓입니다. 엑스포 경쟁 상대에 '오일머니'와 '독재국가' 이미지를 씌우고 '결선에 가면 세계의 유럽과 아프리카(중국의 영향력이 강한 곳)등이 우리를 선택할 것'이란 낙관적 이분법으로 표계산을 한 걸 보면 자명해 집니다. 경쟁을 해도 상대를 비하하거나, 우습게 표현하면 스스로 자승자박을 당하게 됩니다.

대통령이 '잘한다'고 판단하는 국민 중 42%가 잘한다는 이유로 '외교'를 꼽았는데, 그 외교적 상황이 거의 패망의 수준입니다. 세계 정세에 대한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데도, 그 떨어진 판단 능력으로 또다시 정상 외교에 나서는 악순화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자기 객관화'가 불가능한 상태이기때문에 어느새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그 화려한 '의전'에 파묻히게 됩니다. 영부인과 함께 이곳저곳을 다닐때 대한민국의 국격은 계속 하락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봅니다. 이제부터라도 자신이 직접 나서는 정상 외교를 줄이고, 일선 외교 시스템에 자율성을 부여하는 게 맞습니다. 내치가 안되니 외치에라도 몰두하는 것 같은데, 내치와 지지율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외교도 불가합니다. 따라서, 야당과의 대화를 통하여 국민을 위한 상생의 정치를 하여야 합니다.   

 

야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재명 대표의 안위나 억울함을 해소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개인적인 이유이건, 민주당의 공통된 이유이건, 사법부의 판단대상이 되었으며, 이제는 자신을 과감히 버리지 정치를 하여야 합니다. 국민들의 야당에 대한 기대와 정치를 외면하면 안됩니다. 나를 버리지 못하는 정치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수 없는 오기정치이며, 아주 작은 정치 표본의 하나입니다. 얻고자 하면 비워야 하듯 자신을 반드시 비우고 비우면 더 큰 수확의 기쁨을 얻게 되리라 판단해 봅니다. 여든 야든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하여야 합니다. 모든 권력은 오로지 국민으로 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1902년에 태어나 2000년에 열반하신 정행선사의 열반송과 조계종 종정 성파스님께서 자승스님 열반을 보고 남기신 법어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선사들의 열반송이 우리 삶에 있어 닫힌 마음과 상처난 마음을 치유하는 소중한 말씀으로 메아리 치기를 희망해 봅니다. 

 

“이와 같이 오고, 이와 같이 가니 (如是來如是去兮)

100년 생애가 찰라로구나 (百年生涯刹那間)

끝없는 하늘은 한 모양이니 (萬里長天一樣色)

청산은 의연하고 흰구름은 유유할세 (靑山不動白雲流)

(정행선사 열반송)

 

"와도 옴이 없고, 가도 감이 없다. 종정 성파가 만장을 올립니다".

(조계종 성파 종정의 자승스님 열반에 대한 법문)  

 

 

 

이세훈 논설위원 / 경제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