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세훈 논설위원 |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바쁘다 바빠”는 한국인의 생활 특성을 나타내는 문구로 자리 잡았습니다. 산업화와 함께 밤낮으로 일해야 했던 시절에 우리는 참으로 쉬는 시간도 사치라며 열심히 일한 덕에 OECD국가가 되었습니다만, 사람들의 정신의식은 퇴행하여 아직도 과거에 머물고 있습니다.
소득의 격차가 날로 심해지고, 정신적인 폐해가 심각한 수준의 사회가 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저도 제 아이에게 전화를 하면 첫마디가 바쁘다는 말을 건넵니다. 실제로 바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기꺼이 당신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제는 찾을 수 없고, 스스로 한가하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하나도 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리 바빠야 하는 걸까요?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회, 이웃과 공존할 수 없는 사회는 반드시 비정상적인 사회로 변모해 갑니다.
이제 우리사회는 백주 대낮에도 칼을 휘둘러 인명을 살상하거나 공원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젊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속에 살고 있습니다. 지하철 안에서는 하루가 멀 다하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동기에 의한 칼부림과 폭력사태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좋다고 칭찬받던 대한민국의 치안상태는 이제 그 어디에도 없고, 전시나 준 전시 상황도 아닌데 장갑차를 길거리에 대동한 경찰은 더 이상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비웃음 거리만 되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경찰 수뇌부의 생각과는 다르게 민생치안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많은 경찰분도 계십니다만, 이제 국민은 국민 각자가 각자 도생을 해야 하는 험난한 세상살이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모로 준비부족인 세계잼보리대회는 끝이 났지만 정쟁으로 비화되고 있고, 충북 청주 오송의 지하차도에서의 안전불감증에 기인한 수몰사고, 소위 순살 아파트라는 철근없는 건축물을 지어대는 건설회사와 이태원 거리축제 현장에서의 거리참사에 대하여 국민의 안전과 재산권을 지켜야 하는 정부는 그 누구도 아무런 책임지지 않고 있으며,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그 집에 입주한 사람들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상태와 일맥상통한 일처리만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내 일이 아니므로 이런 사고들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 뇌리에서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미국 뉴욕에 있는 친구가 자신이 존경하는 후배교수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현직 대학교수이자 사회참여 역시 활발한 분의 글이었습니다. 잠시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금년 1월쯤 정무직 공직을 마무리하고 여러 나라를 돌면서 지금은 휴식을 취하는 분이었습니다. 이국의 낯선 카페에서 나는 어떤 사람을 보길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는가?에 대하여 고민하신 것 같습니다.
첫번째로 단순하게 살면서도 생각이 깊은 사람을 희망하였고, 가급적 삶은 단순하고 검소하게 살되, 생각의 깊이가 남다른 삶을 원하였습니다.
두번째로는 조금은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희망을 가진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짐을 지고서 살아갈 사람은 없으니 최소한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조금이라도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세번째로는 출중한 능력이 있어도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 저 혼자만 잘나고 영약한 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좌절을 공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네번째로는 논어 이인편에 나오는 말로 君子는 欲訥於言而敏於行을 들어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성실하면서도 행동과 실천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던지고 있습니다.
다섯째로는 과거에 매몰되지는 않지만 과거를 잊지 않는 사람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일제치하의 우리 선대의 삶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강제 징용과 위안부 문제는 아직 진행형입니다.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헌하는 일본정부의 통치행위는 아직도 식민지 야욕을 포기하지 않는 일본정부의 참 뜻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의 동반자 일수는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정당하게 경쟁하여 그들의 야욕을 결코 분쇄해야 할 경쟁자의 입장입니다.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는 민족의 미래는 결단코 없기에 이들과 우리가 함께 할 이유와 명분 역시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를 반대하는 전 국민을 갈라치기 하는 현 정부의 의도 역시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무능한 국정과 위민사상이 결여된 생각이 바로 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여섯째로 멋을 부리는 사람을 택하였습니다. 진지함 보다는 다소 낭만이 있는 삶을 지향한다고 하였습니다. 글쎄,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는 말이겠지만 멋은 스스로 발하여 지는 것이지, 잘 차려 입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기에 저는 생각을 조금은 달리합니다.
마지막으로 선한 인상을 가진 자신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여섯 가지의 목표를 어느정도 실천하였다면 당연히 선한 인상을 갖게 되리라는 말에 동감을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오랜 기간 살아온 자신의 삶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얼굴에 대부분은 투영됩니다만, 인상에 다 나타나는 것은 아니란 생각을 저는 해봅니다. 오히려 감추어진 인성은 우리 마음안에 존재하는 선함이 아닐런지요? 이 분의 생각을 글로 읽으면서 제 경우에는 참 도달하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 다시 중독, 습관화된 생활태도를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를 우리는 중독이라고 합니다. 우리사회는 극심한 중독증세에 빠져 있습니다. “크레이그 네켄”에 의하면 “중독자는 어떤 물질이나 행동이 기분의 기복을 조절해줄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상태로 기분을 바꾸고 싶어서 그러한 것들, 즉, 도박, 섹스, 쇼핑, 절도, 마약, 폭력, 살인에 의존한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중독에 의한 해결방법이 자신에게는 큰 효과가 있을 수도 있으리라 판단도 해봅니다. 중독이라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행복에 대한 갈망을 통제하고 충족시키려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중독이 가져오는 사회적 파장은 자신의 행복추구와 통제에 반하는 결과를 우리 사회 곳곳에 가져옵니다. 지금, 이미 우리 대한민국의 사회는 자신의 과오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지식인도 국민 모두도 나의 잘못이 아니라 상대의 잘못에 원인이 있다고 스스로 진단하고, 상대만을 공격하며, 남 탓 증후군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의 아픔이 잊혀 질 때까지 관망하기에 치유가 되지 않고 사회적 갈등은 더욱 심해집니다. 어디에서 우리는 그 근본원인을 원인을 찾아야 할까요?
장자의 “산목”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빈 배의 이야기인데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배는 인생이라는 강을 타고 흘러내려갑니다. 너무 많이 실으면 배는 무겁고, 무거우면 흐름이 더디고 둔탁해집니다. 배는 비우면 비울수록 가볍게 물을 따라 흘러갑니다.
배를 무겁게 채우려는 것은 탐욕입니다. 반면에 비움은 무심입니다. 채운 것은 채움으로 시끄럽고, 비운 것은 비움으로 고요합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비움이 견디기 어렵고, 비우면 비울수록 채우는 일이 참 하찮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채우는 자는 그 채움에 매이게 되고, 비우는 자는 그 비움으로 인해 더 많이 자유로워집니다. 비우고 비우라는 것이 장자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큰 가르침입니다.
홀로 지내는 삶은 적막합니다. 하루 종일 말할 벗이 없으니 다툼이 없습니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옴을 느낍니다.
가을이 되면 나무 잎은 떨어지고 빈가지로 서있게 되는 나무들을 보며 비움에 대하여 저 역시 생각하게 됩니다. “비움”이란 생물학적 필요 이상의 소유를 갖지 않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자발적인 가난에 스스로 드는 것입니다. 느리게 보고, 느리게 생각하고, 느리게 행동하는 삶의 방식을 우리는 자연에서 배우고, 지극한 비움으로 자연에 살아야 합니다.
노자는 도덕경 맨 마지막장인 81장에서 “信言不美 美言不信, 善者不辯 辯者不善, 知者不博 博者不知, 聖人不積, 旣以爲人己愈有, 旣以與人己愈多, 天之道, 利而不害, 聖人之道, 爲而不爭”이라 말합니다.
즉,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은 따지지 아니하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박식과는 거리가 있고, 박식하여 떠벌리는 사람은 참으로 알지 못합니다.
성인은 재화를 감추어 쌓아 두는 법이 없고, 힘써 남을 위하여 재화를 쓰면 쓸수록 자기가 더 많이 가지게 되고, 힘써 남에게 주면 줄수록 자기가 더 풍요로워집니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할 뿐 해롭게 하지 않습니다. 성인의 도는 사람을 위하여 일을 도모하지만 사람과 다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나눔과 비움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노자가 81장 전체의 텍스트를 신(信)의 문제로써 완결 지으려는 것은 인간세의 핵심은 통치자의 신험할 수 있는 말들 이어야 하고, 또 그 말들의 실천에 핵심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통치자의 말은 반드시 증험 되어야 합니다. 검증되지 않은 통치자의 말은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민을 이간질하여 서로 대립하게 만듭니다. 지금 이순간이 바로 격한 대립속에 국론은 분열되고, 화해가 불가능한 상태로 진입하고 있는 중요한 순간이라 생각해 봅니다.
이제 우리는 잠시 멈춤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좀더 느리게 바라보고, 좀더 느리게 생각하고, 좀더 느리게 행동하고, 그리고 욕망의 곳간을 스스로 비우고,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멈춤을 스스로 선택해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멈춤은 무언가를 내려놓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과의 대화나 삶을 점검하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로부터 고통받는 사람은 없는지, 나로부터 시작된 잘못은 없는지를 살펴보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자성적 반성을 통해 우리 앞에 놓인 인생의 변곡점들을 다시금 나 자신의 이정표로 삼아 앞으로 더 나아가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