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세훈 논설위원 | 안개가 자욱한 아침입니다. 어제 내린 비로 공기는 차갑고 맑습니다. 온 산하가 희뿌연 안개로 자욱하게 보일듯 말듯합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홍차 한잔을 우려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즐겨 마시는 차 중에서 가장 할 말이 많은 차가 ‘홍차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차는 본디 착한 ‘자연의 선물’이라 청정하고, 이를 마시는 사람 역시 마음이 맑아져야 하는데 차를 두고 약탈하고 전쟁을 벌였으니, 차가 보기에 얼마나 인간들이 어리석은 존재로 보일까 생각해 봅니다.
본지 논설위원 이세훈
중국의 아편전쟁은 인류사의 아픈 역사중 하나입니다. 19세기 초 영국인들은 차 마시기를 좋아했었습니다. 특히, 중국의 차 맛은 매우 좋아 구매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고, 홍차의 무역대금으로 은을 지불하였으나, 은이 점차 고갈되면서 대중국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인도 산 아편을 중국에 밀매하게 됩니다. 19세기 초 이래 급격히 늘어난 아편밀매는 중국의 절대 빈곤층인 농민까지도 아편 중독자로 만들면서 이제는 반대로 중국의 은이 영국으로 대량 유출되게 됩니다. 그 결과, 중국농민들의 부담과 건강은 크게 악화되고 국가재정도 궁핍하게 됩니다. 이에 청의 ‘임칙서’는 영국의 아편을 몰수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영국은 중국을 공격한 것이 바로 아편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중국의 신사층과 민중이 평영단을 조직하여 영국군을 공격하기도 하였지만, 청군은 철저하게 패배하게 되고, 청은 영토의 할양, 배상금 지불, 5개 항구의 개항을 약속한 난징조약을 통해 관세 자주권 상실, 영국 최혜국 대우 및 치외법권 등을 인정하는 호문 추가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 조약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으로 기록되게 됩니다.
홍차는 세계 차 소비량의 1위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차입니다. breakfast tea, afternoon tea로 홍차문화를 주도한 것은 영국이지만 홍차의 원산지는 중국입니다. 중국의 홍차는 1610년 유럽으로 유입되어 1662년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가 영국 찰스2세와 결혼할 때 혼수품으로 가져가서 영국 황실과 귀족사회에 전파되게 됩니다.
이때, 유럽인을 매료시킨 중국 홍차의 정식명칭은 ‘정산소종’입니다. 유럽에서는 ‘정산소종’을 ‘WUYI BOHEA’, 또는 ‘랍상소우총’이라고 부릅니다. ‘정산소종’의 탄생은 우연히 발생되었고 합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송나라때까지 유행했던 병차(떡차)를 금지하고, 산차(잎차)를 마시도록 법령을 제정하고, 공차원을 우이산에 설치하므로서 우이산 일대의 차문화가 크게 흥성하게 되었답니다. 명나라 중후반 어느 날, 명나라 군대가 통무관에서 숙박을 하게 되었고, 마침 차를 재배하는 농부가 이른 아침 이슬이 마를 무렵,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차는 당일 채엽, 당일 제다를 원칙으로 합니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 수발을 드느라 차를 덖을 시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튿날 군인들이 떠나간 후 수북이 쌓인 찻잎을 바라보니 축축하게 시들고 거뭇거뭇 산화되어 있었습니다. 차농은 자식같이 알뜰살뜰 키워온 찻잎이 아까워 차마 버리지 못하고 소나무 장작을 때서 찻잎을 말렸는데 이때, 찻잎이 검 붉어지고 소나무 훈연향이 배게 되어 차농은 시장에 싼 값에 내다 팔았으나, 얼마 후, 바로 그 차를 사겠다고 사람들이 통무관으로 몰려왔습니다. 녹차보다 진하고 달달하고 향기로운 붉은 차, 소나무의 훈연향이 더해진 차, 이것이 바로 홍차이며, ‘정산소종’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새로운 차, 바로 홍차입니다. 홍차는 찻잎을 따서(채엽) 비빈 후(유념) 공기와 접촉해 산화하도록 쌓아둔 후(산화 완전발효) 건조하는데, 이 홍차의 제다과정이 명나라 차농의 우연적 행위에 그대로 들어있습니다.
홍차의 원조 ‘통무관 정산소종’은 푸졘성(福建省) 우이산시(武夷山市) 싱촌전(星村鎭) 통무촌((桐木村)입니다. 통무촌은 통무관(桐木關) 마을입니다. 통무관은 푸졘성(福建省)과 쟝시성(江西省)의 관문으로 우이산맥에서 가장 높은 황강산 근처에 있습니다. 통무관을 정점으로 사방 50km이내를 정산(正山), 즉 원산지 차산(茶山)으로 분류하며 지금은 원산지 보호법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소종(小種)’은 소엽종 차나무 잎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정산소종’이 고가로 유통되며 대유행하자 여기저기에서 ‘정산소종’을 모방한 차를 만들어내서 ‘정산(正山)’과 ‘외산(外山)’의 논쟁이 있었습니다만, 본래 소나무 훈연향이 나는 차는 ‘통목관 정산소종’의 중요한 특징이었으나, 현대에는 소나무 훈연향이 나는 ‘유연(有烟) 정산소종’보다 훈연향이 나지 않는 ‘무연(無烟) 정산소종’이 더 인기가 있습니다.
청나라 때에는 통무관에 소나무가 많았고 유럽까지 이동해야 하는 유통문제로 훈연하였으나, 현재 통무관은 중국국가급 자연보호구역으로 벌목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굳이 훈연향을 입히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소나무 장작을 실어 와야 하는데 차를 훈연하기 위해 대량의 소나무를 벌목해야 하는 환경문제 또 외부 소나무에 묻어올 수 있는 병충해문제 등으로 소나무 훈연을 장려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현대는 설비와 교통이 발달한 관계로 훈연하지 않고도 신선한 정산소종을 만들 수 있고, 유통할 수 있으며, 영양학적으로도 훈연하지 않은 차가 좋다고 합니다.
차는 찻잎을 피워낸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통무관은 융기와 침식에 의한 붉은 단하(丹霞) 지형에 전형적인 아열대 원시림으로 새와 곤충과 야생화의 고향이라 불릴 만큼 생태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계절 내내 난초꽃, 창포, 계화, 두견화와 수백종의 야생화가 피어 공기 중에 꽃향기가 떠다닙니다. 수백 년 된 차밭의 오래된 차나무를 통목관에서는 노총이라 하는데, 마치 야생차 나무처럼 인위적인 재배를 자제하고 동쪽에 몇 그루, 서쪽에 몇 그루 띄엄띄엄 펼쳐져 최대한 원시림 속의 자연환경에 어울리도록 보존되어 있습니다.
통무관촌에는 열 두 개 마을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대에서 백년넘게 대대로 차를 만들어 온 차농의 집에서 전통 제다법으로 수공제다한 특급 정산소종을 우려 내는데, 찻잔 속에 오롯이 담긴 ‘정산소종’, 홍갈색 수색의 윤기가 영롱합니다. 달콤한 몰트향(맥아당향)이 몸을 편안하게 이완시키고 입안에 쫀쫀하게 단맛이 남습니다. 뒤이어서 이름 모를 야생화 향기가 아스라이 번지고 깊은 산운(高山韻)이 밀려와 명랑한 기쁨이 샘솟기도 합니다.
‘통목관 정산소종’ 홍차
위화의 '인생'이란 책을 살펴보다가 서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인생'이란 장편소설은 어느 판사의 판결과 판결후에 건넨 한권의 책으로 인해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겨울이었고, 판사는 판결을 하면서 날씨가 너무 추우니 일단 찜질방 에서라도 지내라며 자신의 서가에 있는 책 속에 10만원을 넣어 피의자에게 건넸습니다. 이때 10만원과 함께 건넨 책이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인 ‘인생’이었습니다. 저 역시 궁금한 마음에 위화작가의 등단 40주년 기념 특별판으로 재출판된 ‘인생’(백원담 옮김· 푸른숲 출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민요를 채집하러 여름철을 농촌에서 보내고 있는 젊은이가 ‘푸구이’라는 늙은 농부를 만나 그의 인생을 서술한 장편소설로 ‘인생’ 또는 중국어 원제는 ‘활착(活着)’입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주름투성이 ‘푸구이’는 늙은 소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쟁기질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황제는 나를 불러 사위 삼겠다지만, 길이 멀어 안 가려네.” 젊은이는 늙은 농부의 귀여운 허풍에 끌려 말을 섞었다가, 정확한 기억력과 뛰어난 묘사로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술술 풀어내는 ‘푸구이’에게 빠져 들고 맙니다.
그의 인생 정말 기구했습니다. ‘푸구이’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한량으로 살다 도박 빚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가세가 기운 충격에 아버지는 사망하게 되면서, 소작농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국민당 군대 끌려갔다가 인민해방군의 도움으로 귀향하게 되고, 어머니의 사망과 딸 ‘펑샤’가 열병으로 청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아내인 ‘자전’은 구루병에 걸리고, 대약진 운동으로 이들은 기아상태에 이르게 되며, 아들 ‘유칭’은 헌혈 중 의료사고로 사망하고, 문화대혁명 시기 친구인 ‘충성’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후, 딸 펑샤는 결혼을 하게 되는데, 펑샤는 출산 중에 사망하고, 손자 ‘쿠건’이 출생하게 됩니다. 이후, 아내도 사망하고, 사위도 사망하고, 손자마저 사망하는 주인공 빼곤 등장인물이 죄다 죽어버리는 절대 비극의 세계입니다.
이들 모두가 사망에 이르는 과정도 처절합니다. 두 다리가 새 발톱처럼 힘이 있어 한 번도 주저앉은 적이 없다는 점을 자부했던 아버지는 전 재산이 날아가자 똥통에 미끌어져 돌아가고, 평생 고생을 몰랐던 모친도 큰 병을 얻어 아들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게 됩니다.
아들 유칭은 지방 고위 관리 아내를 위해 수혈을 해주다가 의사가 너무 피를 많이 뽑아버리는 바람에 쇼크사합니다. 딸 펑샤 인생 또한 눈물 납니다. 어릴 적 열병으로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게 되었지만 착하고 영리했던 펑샤는 마음씨 고운 남자 ‘얼시’를 만나 달콤한 행복을 누리지만, 첫아들을 낳다 눈을 감습니다. 지병으로 고통받던 아내는 석달 뒤, 딸의 뒤를 따라 죽습니다. 이후에도 기막힌 죽음은 계속 이어집니다. 아들처럼 살뜰했던 사위 얼시는 일터에서 시멘트판에 끼어 압사하고, 그래도 손자인 쿠건에게 마음을 붙이며 살아가는 푸구이에게 한 가닥 평화가 찾아오나 싶었는데, 여섯 살 쿠건은 굶주림에 콩을 마구 집어먹다가 숨을 거둡니다.
“쿠건은 콩을 너무 많이 먹어서 죽은 거라네. 그 아이가 게걸스러워서가 아니라 우리 집이 가난해서 그리 된 거지. 쿠건은 콩도 양껏 먹을 수 없었다네. 내가 정신이 나갔던 게지. 그렇게 많은 콩을 삶아 주다니…..”
푸구이의 자책은 노을빛 들판에 조용히 번져갑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유일한 존재는 늙은 소 ‘푸구이’입니다. 쿠건이 죽고 난 뒤 ‘푸구이’는 손자가 오매불망 그렸던 소를 사러 시장에 갑니다. ‘푸구이’도 힘 좋고 팔팔한 젊은 소를 사기를 원하였지만, 도살 직전 눈물을 뚝뚝 흘리는 늙은 소를 발견하고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함께 집에 돌아옵니다. “소를 볼 줄 아는 사람이 길어야 2~3년 밖에 살지 못할 거라 말을 합니다. ‘푸구이’는 오히려 내가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 걱정하고 있었는데, 내가 오늘까지 살아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바로 이틀전에는 누군가 이런 말까지 했다네. ‘두 늙은이가 다 죽지를 않는다고…’”
‘인생’의 중국어 원제는 ‘활착’입니다. 살 활(活), 붙을 착(着). 뿌리를 내려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위화는 활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활착은 매우 힘이 넘치는 말로, 그 힘은 절규나 공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내, 즉,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을 견디는 데서 나온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푸구이’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 시대의 무자비함에서 비롯됐든 또는 타인의 과실에서 기인한 것이든, 끝까지 고통을 감내하는 모습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많이 닮았습니다.
위화는 미국의 사실주의자 작가이자, 노예제 반대자인 해리엇 비처 스토(1811년-1896년)의 작품 ‘톰아저씨의 오두막’에서 영감을 받아 ‘인생’이란 작품을 썼다고 했습니다. 어린시절 같은 내용의 소설 ‘톰아저씨의 오두막’을 읽으며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링컨 대통령은 ‘노예제가 폐지된 데는 이 책의 저자인 ‘해리엇 비처 스토’가 이바지한 바가 크다고 치하했다고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 잃어버리고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 톰은 관대함과 성실함, 현명함을 갖춘 인물로서 만일, 피부가 검지 않았다면 당대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을 분명 비범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푸구이는 톰과는 아주 다릅니다. 노름과 주색에 빠져 스스로 인생을 망쳤고 꼬마인 아들에게 주먹질을 하고 어린 딸을 식모로 내주기도 했습니다. ‘푸구이’는 굴곡진 중국 현대사에서 아주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수동적 인물 같기도 합니다.
인생이란 책을 노숙자에게 준 판사는 박주영 판사로, 이 사건을 선고하기 전에 피의자를 파악해 보았는데, 피의자는 평생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정부지원을 일체 거부하고 공원 굴다리 밑에 텐트를 치고 27년째 살고 있었다고 파악을 했다고 합니다. 이 피의자는 지인과 술 한잔하거나 시간이 남으면 근처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는 게 낙이고 소설가를 꿈꿨던 적도 있는 분이라 박주영 판사는 일단 급한대로 10만원을 주게 되었는데 “돈만 봉투에 넣으면 좀 이상할 것 같아” 선고 전날 자신의 서가에서 ‘인생’이란 장편소설을 꺼내 그 안에 돈을 넣어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분은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여전히 노숙 중이지만, 고물상 일을 계속하면서 특별한 일 없이 보호관찰을 잘 받고 계시다 합니다. 사실, ‘푸구이’ 노인도 대단한 인생 반전은 없었지만, 늙은 소와 진흙 밭에서 구르면서 잘 웃고 수다도 잘 떨고 하셨으니, ‘활착’이 꼭 화려하고, 번듯한 집에서 사는 걸 뜻하는 건 아니라고 믿게 됩니다. 이분은 집과 주민등록만 없다 뿐이지, 그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사는 분입니다. 위화 작가가 말했듯, 치열하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 형태와 모양이 뭐가 중요할까 생각해 봅니다. 노숙인의 삶이 비참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생각 역시 우리의 편견일수도 있습니다.
이 소설 보다 사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인생”이 더 유명합니다. 연출자 ‘장이머우’가 이 소설을 바탕으로 1994년 갈우와 ‘공리’ 주연으로 영화를 발표해 그해 열린 제47회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푸구이 역의 배우 갈우도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저 역시 이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장이머우’ 감독이 '인생'이란 소설을 바탕으로 1994년 갈우와 ‘공리’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인생"
영화나 소설 “인생”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위화’라는 작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작가 ‘위화’는 1960년 4월 3일 중국 저장성 항저우 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위화의 부모님은 의사로 일했기 때문에, 가족은 장례식장 건너편 병원 구내에 살고 있었다 합니다. 이런 환경으로 그의 유년시절은 죽음에 매우 가까웠다는 느낌이 듭니다. ㅁ자 형태의 사합원의 1층에는 위화 가족의 집과 영안실이, 2층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터인 병원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중국 농촌의 병원은 대개 뒷마당의 연못에 환자들의 살점과 피를 버려 파리가 들끓는 비위생적인 곳이었지만, 위화의 가족은 화목하게 일상생활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중국을 소용돌이로 만든 문화대혁명을 위화의 집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위화의 아버지가 의사였기에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권파로 몰리게 됩니다. 이 때문에 집안에서 자아비판투쟁이 벌어지고 초등학생인 위화와 중학생 형이 부모에게 자본주의적 잔재를 추궁하게 됩니다. 위화의 부모는 '억고사첨반'이라는 구사회에서 빈민들이 먹던 음식을 일부러 먹으며 이웃에 반성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쇼'도 했다고 합니다. 위화의 어린시절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은 바로 이 문화대혁명입니다.
문화대혁명은 위화가 7세에 시작하여 17세까지 일어났으며, 이러한 이유로 그의 작품들 중 많은 작품들이 그 당시 만연했던 폭력과 혼란을 포함하게 됩니다. 위화는 문화대혁명이 들이닥친 어린시절 읽을 책이 없어서 ‘마오쩌둥 선집’을 읽었는데 선집의 주해에서 읽는 재미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여타 혁명 책들과 마찬가지로 “감정은 없었지만, 주해에는 이야기와 사건과 인물이 있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문화혁명 후기에 접어든 고등학생 때는 서양 소설 책도 ‘몰래’ 빌려 읽을 수 있었지만, 서문과 결말이 뜯겨져 나간 경우가 많았고, 결말을 알 수 없는 소설을 읽은 것이 상상력 훈련법이었던 것 같다고 그는 회고합니다. 위화는 당시를 떠올리며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과 산문, 시가 전부 루쉰 아니면 마오쩌둥의 작품이었으니, 루쉰과 마오쩌둥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성장했다고 회고합니다. 위화는 항저우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청소년기를 하이양의 우위안현에서 보냈으며, 그곳은 작은 마을이고 마을의 분위기는 단조롭다고 생각됐지만, 위화는 이 배경으로 많은 소설에 고향의 사람들을 등장인물로 사용합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위화는 치의학을 전공한바 있습니다. 하루 종일 사람들의 입을 들여다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1983년에 소설가로 직업을 바꾸었다고 회고하면서, 위화는 치과의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았고, 6년 동안 치과의사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당시 마오쩌둥은 강력한 공공위생 방역체계를 세웠으나, 예산부족으로 전국의 병원들은 주사기를 재활용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치과의사는 박봉의 가난한 직업 중 하나였는데, 위화는 "1980년대 중국에서는 치과의사도 가난했고 작가도 가난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치과의사는 고생하면서 가난했고, 작가는 자유로우면서 가난했다고 회고합니다.
치과의사 생활방식에 싫증이 나자 위화는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1983년 베이징의 한 문학잡지 편집인의 눈에 띄게 되었고, 때로는 베이징으로 달려가 편집인이 던져주는 글의 교정을 봐주기도 했습니다. 그 뒤 치과의사 직업을 버리고 현 문화관과 ‘가흥문련’에 들어가 문예 창작을 배우게 됩니다. 위화는 2차례 베이징 ‘루쉰문학원’에 들어가 공부했고, 나중에 부인이 된 시인 진홍을 만나게 됩니다. 진홍이 베이징에서 일했기 때문에 위화는 후에 베이징으로 이주하게 되며, 현재는 그의 고향인 저장성 항저우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83년 소설가로 데뷔해서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1983년 단편소설 <첫 번째 기숙사(第一宿舍)>를 발표한 이후 지금까지 소설가로 활동 중인데, 1990년대부터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을 가미한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인생'과 '허삼관 매혈기'와 같은 걸작을 써내며 모두 히트시키며 중국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그의 작품에는 슬픔과 풍자와 희극과 비극이 작품 속에 버무려졌고, 국공내전, 공산혁명, 인민공사,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같은 굵직굵직한 중국 현대의 역사적 사건도 자연스레 작품 속에 녹아들어있습니다. 이 점에서 위화는 근 현대 중국 문학의 아버지 루쉰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루쉰도 ‘아Q정전(阿Q正傳)’과 ‘쿵이지(孔乙己)’ 등 작품에서 모순덩어리 주인공을 내세워 중국 근대의 부조리와 위선을 꼬집은 바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카락 하나에 3만 근을 매달아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중국 속담이 있는데, 위화의 장편소설 “인생”은 사람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떻게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에 관해 쓴 글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소설은 농촌으로 민요를 수집하러 간 작가에게 늙은 농부 푸구이가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다시 소설의 주요부분을 회상해 봅니다.
부잣집 지주인 쉬씨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푸구이는 기생과 도박에 빠져 모든 재산을 날려버리고 하루아침에 가난한 초가집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는 결국 먹고 살기 위해 전에는 자신의 땅이었으나 이젠 그 땅의 소작농으로 전락해 생활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년여 만에 어머니도 병으로 쓰러졌고, ‘푸구이’가 어머니를 진료할 의원을 데리러 갔던 시기는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고, 그는 길에서 국민당 군대에 붙들려 전쟁에 끌려가 버립니다. 2년 만에 겨우 집으로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그에게는 아내(자전)와 딸(평사)과 아들(유칭)이 있었습니다. 딸 평사는 고열로 인한 후유증으로 벙어리가 되었으며, ‘푸구이’가 가족들에게 아무런 역할을 못 한 채 살아가던 중에 토지개혁이 시작되어 땅을 분배 받게 됩니다. 그의 전 재산을 도박으로 갈취해 간 룽얼이라는 자는 악덕 지주로 지목되어 총살당하게 되고, ‘푸구이’는 만일 자신이 도박으로 땅을 잃지 않았다면 총살을 당한 사람은 바로 자기였을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너무나 가난해서 아들 유칭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말을 못 하는 딸을 남의 집 식모로 보냈으나 구박을 견딜 수 없어 한밤중에 펑펑 울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모습을 본 ‘푸구이’는 식구들이 모두 굶어 죽더라도 다 같이 살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식량난이 갈수록 심해져서 양식은 떨어졌고 구루병에 걸린 아내의 상태는 점점 악화됩니다. 열세 살 된 아들은 교장 선생에게 수혈을 해주다가 의사가 채혈을 너무 과도하게 해서 죽고, 착한 청년과 결혼한 딸도 아이를 낳던 중에 죽게 됩니다. 이후, 투병 중이던 아내마저 고통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위조차 일하던 현장에서 사고로 죽게 되고, 손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푸구이’가 준 콩을 너무 많이 먹다가 죽고 맙니다.
‘장이머우’ 감독과 1994년 갈우와 ‘공리’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인생"
온 가족이 죽고, 죽고, 또 죽고…. 그는 부모와 자기 아내, 두 자식들, 심지어 사위와 손자까지도 잃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지경이 되니 오히려 ‘푸구이’는 모든 일에 초연해집니다. 그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늙은 소를 한 마리 사서 그 소의 이름도 ‘푸구이’라고 지어주며 남은 생을 함께 합니다.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중국의 국민당, 토지개혁,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그 혼란한 정세 속에서 고통받는 지극히 평범한 개개인의 삶을 보여주면서, 누구를 위한 개혁이고 혁명인지 알 수 없다고 한탄하면서 무질서한 세상 속에서 삶이란 견디는 것, 운명에 순응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것 같습니다.
작가 위화는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 '인생"에 대하여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 책의 끝 무렵에 노인의 노랫소리가 텅 빈 저녁 하늘에 바람처럼 들려옵니다.
"어린 시절엔 빈둥거리며 놀고, 중년에는 숨어 살려고만 하더니, 노년에는 중이 되었네."
홍차 한잔을 우려내어 마시는 동안 날이 밝았고, 다시 읽기 시작한 위화의 ‘인생’의 사회적 배경은 홍차의 약탈로 시작된 외세에 의한 중국침탈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중국내부의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내전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끝 모를 변화에 직면하게 되고,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그저 살아갔을 뿐'이라는 대목은 우리의 인생과 다름이 없습니다.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아편전쟁으로 촉발된 중국사회의 깊은 고통은 내전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제국주의 열강에 함께 맞섰던 국공합작에 이어 홍위병에 의한 마오쩌뚱에 의한 사회주의화가 이루어 졌고, 깊은 통찰속에 오늘을 맞고 있습니다. 동인도 회사를 앞세운 영국의 식민지 수탈과정과 ‘해가지지 않는 나라’, ‘신사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영국의 진면목도 이 소설을 통하여 들어납니다. 모든 세상일에는 거저 받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와 동맹관계인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서로 주고받는 것이지 거저 받는 건 없습니다. 한국 동란에서 동맹의 힘으로 우리나라를 지켜 주었다고 그들은 말하지만, 그들이 합의한 것은 반쪽의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리와 현실앞에서 우리 한반도를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타의에 의하여 나누어 버린것입니다.
수 없는 삶의 변화속에 우리는 ‘푸구이’ 노인의 말을 이제 또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세훈 외교저녈 및 UN JOURNAL 논설위원/ 경제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