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보릿고개,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그 시절의 이야기

- 담화 이존영 기자의 칼럼 보릿고개 이야기

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존영 기자  | 누구나 흔히 듣는 ‘보릿고개’라는 단어는 하지만 이 단어가 단순히 배고픈 시절을 넘긴다는 의미 이상의 고통과 눈물이 깃든 역사라는 것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보릿고개(麥嶺)는 말 그대로 보리가 여물기를 기다리며 굶주림과 싸워야 했던 농민들의 처절한 현실을 가리킨다. 이는 한마디로 "배고픔이라는 고개를 넘어가는 것"과 같았던 시절에서 비롯되었다.

 

 

보릿고개란 무엇인가?

 

보릿고개는 지난 해 수확한 곡식을 다 먹고, 새로운 농작물 수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춘궁기春窮期를 뜻한다. 특히, 음력 4월부터 보리가 익는 초여름까지의 기간은 농촌에서 가장 힘겨운 시기였다.

 

전후 한국은 전쟁으로 국토가 폐허가 되었고, 농촌은 더욱 어려웠다. 그나마 수확한 곡식은 빚을 갚거나 소작료로 내고 나면 농민들이 먹을 것은 거의 남지 않았다. 결국 구황작물救荒作物과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배를 채우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구황작물과 초근목피의 고통

 

구황작물은 조, 피, 메밀, 감자, 고구마 등 척박한 땅에서도 자라는 작물을 뜻한다. 하지만 수확량이 적었고, 그것조차 부족해 사람들이 배고픔을 달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풀뿌리와 나무껍질조차 식량으로 사용되었다. 소나무 껍질을 벗겨 죽을 쑤어 먹거나 흙을 물에 개어 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음식은 사람의 몸에 맞지 않아 변비와 배탈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까지 생겼다.

 

 

배고픔을 넘어선 고통

 

가난한 농촌의 풍경은 단순히 먹을 것이 없다는 문제를 넘어선 것이었다. 아이들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해 버짐과 부스럼투성이 얼굴로 지냈다. 겨울이 되면 동상에 손과 발이 갈라졌고, 감기와 기침은 늘 달고 살았다.

 

농사일은 새벽별을 보며 시작해 저녁노을 아래에서야 끝났다. 모기, 파리, 뱀과 싸우는 것은 일상이었다.


생산량이 부족했던 당시, 가뭄과 홍수는 또 다른 재앙이었다. 논바닥이 갈라지면 호미로 땅을 파며 모를 심고, 두레박으로 물을 퍼 나르며 농사를 지었다.

 

변화를 이끈 노력과 희망의 씨앗

 

그토록 어렵던 시절에도 희망은 있었다. 1960년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 운동은 농촌의 변화를 이끌었다.

 

화학비료의 보급은 곡식 생산량을 늘렸고, 미국 등 우방국의 밀가루 지원은 가난을 덜어주었다.

산림 녹화 사업은 황폐했던 땅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농기계의 보급과 과학적인 농업기술은 농촌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우리에게 남겨진 보릿고개의 교훈

 

지금은 누구나 먹을거리가 풍족하고, 농촌조차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절의 고난이 우리에게 준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허리 굽혀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짓고, 땅을 일군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풍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새로운 세대를 위한 메시지

 

혹시 이 글이 젊은 세대에게는 "고생을 생색내는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의 이야기는 단순히 옛날 얘기로 끝나지 않는다. 보릿고개를 견뎌낸 선조들의 이야기는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는 끈기와 노력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손발이 부르트도록 노력했던 그 시절 사람들의 삶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한다. 추억을 깊어가는 가을, 그 시절의 친구들과 떠올리며, 모두가 한마음으로 보릿고개를 넘어왔던 시간을 되새겨보자.

 

그때를 함께 견딘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우리가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