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존영 기자 | 서울 창경궁의 중심부, 봄이면 벚꽃이 만개하고 연못에는 청둥오리가 유유히 떠다니는 고즈넉한 장소, 춘당지春塘池. 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 묘하게 이질적인 석탑 하나가 세워져 있다. 바로 보물 제1119호 창경궁 팔각칠층석탑이다. 많은 관람객들이 이 탑 앞을 스쳐 지나간다. ‘탑이 있으니 오래된 문화재겠지’라며 작은 안내판 하나만을 읽고 무심히 지나친다.

그러나 이 석탑은 단순히 ‘오래된 보물’이 아니다. 이 탑은 한국 땅에서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조선 왕실과도 직접적 연관이 없다. 오히려 이 탑은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문화정책의 결과로 궁궐에 박제된 타국의 유물이다.
“大明成化六年” – 이 탑은 조선의 것이 아니다 팔각칠층석탑의 몸돌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대명 성화 6년 경인세 추칠월 상한길일조 大明 成化六年 庚寅歲 秋七月 上澣吉日造
자세한 한자 풀이
大明대명 : '명나라'를 뜻합니다.
成化六年성화육년 : 명나라 성화제成化帝 즉위 6년, 즉 서기 1470년입니다.
庚寅歲경인세 : 육십간지 중 경인년庚寅年, 성화 6년에 해당하는 간지입니다.
秋七月추칠월 : 가을, 음력 7월
上澣상한 : 상순, 즉 그 달의 초순
吉日길일 : 좋은 날, 길한 날
造조 : 만들다, 건립하다.
이는 중국 명나라 성화 6년, 즉 1470년에 이 탑이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조선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중국 요양 지역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장수를 기원하며 건립한 불탑이다.
양식 또한 한국의 전통 삼층석탑과는 완전히 다르다. 둥글고 불룩한 몸돌, 기와지붕을 본뜬 지붕돌, 팔각형 기단 등은 모두 중국식, 특히 티베트계 라마탑의 영향을 받은 형태다. 다시 말해, 이 탑은 한국 불교미술과 무관한 외래 유물인 것이다.
어떻게 이 탑이 창경궁에 들어왔는가?
그 결정적 배경은 1910년대 일제강점기, 창경궁에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이 세워지면서 비롯된다. 이왕가박물관은 일제가 조선 왕실을 격하시키기 위해 만든 공간이었다. ‘이왕李王’은 조선 황제를 일본 천황의 친족 수준으로 격하한 호칭이고, 이 박물관은 왕실의 유물들을 ‘박제’하듯 전시함으로써 왕실의 위엄을 부정하고 문화적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수단이었다.
팔각칠층석탑은 1911년, 일제가 만주의 상인에게서 구매해 창경궁에 들여와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궁궐 한복판에, 한국과 무관한 이국의 탑을 세운 것이다. 그 의도는 분명했다 — 궁궐의 상징적 위엄을 흐리고, 이질적인 문화를 혼합함으로써 조선의 고유성과 왕실의 독립성을 훼손하려는 문화 식민정책의 일환이었다.
춘당지, 왕실의 정원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만든 공간
팔각칠층석탑이 서 있는 장소인 춘당지 역시, 단순한 연못이 아니다. 본래 조선 왕들이 학문을 권장하기 위해 설치한 춘당대春塘臺가 있었던 자리로, 왕실의 정원과 교육의 의미가 담겨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창경궁을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으로 개조했다. 궁궐의 권위를 제거하고, 시민들의 오락 공간으로 바꾸기 위해 궁궐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한 것이다.
춘당지는 그 중심이었다. 정원으로서의 의미를 지우고, 연못 주변에 조류와 희귀 동물을 전시하는 전시장처럼 사용했다. 왕의 공간이 오락의 공간으로, 정신적 상징이 소비의 장소로 전락한 것이다.
그저 오래된 석탑이 아니다. 식민주의의 흔적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탑을 그냥 “이쁜 돌탑” 혹은 “고풍스러운 유물” 정도로 지나친다. 하지만 단 한 줄의 설명만으로는 이 탑의 복합적인 역사와 식민 잔재로서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
청소년들, 그리고 후손들은 반드시 이 탑의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 한다. 이 탑은 한국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조선 궁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일제가 박물관 전시를 위해 임의로 들여온 외래 유물이다. 창경궁과 춘당지를 변형하고 왕실의 정체성을 훼손한 상징적인 잔재다.
이 탑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현재 이 탑은 보물로 등록되어 있지만, 그 위치와 해석 방식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궁궐 내에 계속 두어야 할지, 별도의 공간으로 이전해야 할지, 혹은 설명문을 대폭 보완해 역사적 진실을 명확히 알려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문화재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귀중한 것이지만,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목적에 의해 이 자리에 세워졌는지를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이 탑은 일제가 조선 왕실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문화를 식민화하려 했던 구체적 사례다. 지금 우리가 그것을 모른 채 바라본다면, 그들이 의도했던 침묵과 왜곡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창경궁의 팔각칠층석탑과 춘당지는 ‘보물’이기에 앞서, 질문을 던지는 공간이다.
"이것은 누구의 것이며, 왜 여기 있는가?“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문화 주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