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세훈 논설위원 |
홍익인간 이화세계, 개천절 정신은 아직 살아 있는가?
김광규 선생의 시다. 누구나 한번은 단숨에 읽고, 깊은 사념에 빠져 보았을 소중한 시다. 시인은 1941년생으로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하셨으며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중이시다. 고려대 교수이며, 문학평론가인 이남호 선생의 평에 의하면, “김광규 선생의 시는 그 생각에 비뚤음이 없으며, 그 어조에 격렬한 부르짖음이 없고, 그 은유에 현란한 모호성이 없으며, 그 관심이 소박한 일상을 넘어서지 아니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뜻이 분명하고, 읽는 이들에게 쉽고 친밀한 느낌을 준다”고 평하였다.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란 시 전문이다.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타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 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시는 읽는 사람의 정서를 닮아 제각기 읽고 느끼게 마련이다. 그 시대의, 그 감성이 그대로 묻어 있는 똑같은 시지만 같은 시를 읽어도 각기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분명 각자가 지닌 정서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이 시는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고 고백하며,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묻는 자기 자신을 향한 자성의 시다.
김광규 시인이 이 시에서 지적한대로 4.19 혁명 기간을 전후하여 혈기왕성한 지식인이며, 젊은이들의 방황과 고뇌를 충분히 알수 있다. 그러나, 4.19혁명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또다시 발생한 5.16 군사정변 치하에서도 이땅의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진실보다도 가족과 함께 생존하며 살아 나가는 것이 더 중요했었다 생각된다. 따라서, 민중의 저항 역사는 또 다시 더 깊은 암흑속으로 퇴행하기 시작했다. 오랜기간 박정희 대통령 치하에서 모든 민중은 공권력의 감시하에 숨죽이며 살아야 했고, 흩어진 민중은 나름의 방식대로 간절한 자유, 민주와 정의, 인간본성을 쟁취하기 위한 길고 긴 여정을 보내야만 했다. 이 시절 역시 인간 본연의 본성인 자유를 억압하는 일은 더욱 많아졌고, 이는 경제부흥과 산업화라는 미명하에 남몰래, 오랜기간 동안 음지에서 자행되어졌다. 이 시기의 젊은이 역시 쾌쾌한 골방에 들어 앉아 자유가 어떻고, 정의가 어떻고 논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두려움에 떨던 시기가 있었다.
이에 김대중 대통령은 1975년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의 편이라 하였고, 방관은 최대의 수치이며, 비굴은 최대의 죄악"이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간혹 집단행동을 한 경우에는 1972년 유신헌법의 제정으로 규정된 대통령의 권한으로 계엄 포고령과 긴급조치 6호니 9호 위반으로 당국에 억류되어 몸이 부자연스럽게 되거나 내란죄란 명목으로 사형을 언도받는 일도 많았다. 이후 세대를 우리는 소위 386(60년대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니고, 90년대에 30인 세대)이니, 586이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은 대부분 80년대 학생 운동권 출신들의 젊은이들로 이 세대를 대표하는 지성인과 신진인물들로 지칭되면서 정치권에 발탁되어 대거 유입되면서 큰 기대를 받아왔었지만, 지금 현재는 MZ세대를 대표되는 젊은이들과 상당수의 국민들로부터 그들의 진정성이 의심받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절대절명의 정치적인 임계치가 위험한 순간에 도달하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나 말과 행동이 다른 그들의 이중성은 우리 사회의 큰 경종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으며,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정권을 내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저서인 "중용"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修道之謂教(수도지위교), 道也者(도야자)),不可須臾離也(부가수유리야);可離非道也(가리비도야), 是故君子戒慎乎其所不睹(시고군자계신호기소부도),恐懼乎其所不聞(공구호기소불문)。莫見乎隱(막견호은),莫顯乎微(막현호미)。故君子慎其獨也(고군자신기독야)"
"하늘이 명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우리는 본성이라 하고, 그 본성을 충실히 따르는 것, 그것을 도라한다. 즉, 우리 삶의 길이라고 한다. 그 길을 쉼이 없이 닦는 것, 그것을 가르켜 우리의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도라하는 것은 한순간도 우리로 부터 떠날수 없는 것이다. 만약 도가 우리를 떠날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참된인간(군자)은 보이지 않는 데서 경계하고, 삼갈(계신)줄 알아야 하며,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숨어있는 것처럼 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세한 것처럼 명백한 것이 없다. 은미한 것이야 말로 우리 삶의 명백한 기준이다. 그러므로, 참된 인간(군자)는 홀로 있을 때,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그때를 삼가고,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는 것이다."
10월 3일은 개천절이다.
개천절이라고 이름을 붙이기 이전부터 우리 민족은 음력 10월을 상달(上月)이라 부르며 제천행사를 치렀다. 개천의 핵심은 제천의식으로 이 날은 하늘 앞에 자신을 돌아보고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라는 고조선의 시조 단군의 뜻을 다시 상기하는 날이다.
이러한 제천의식은 고조선 멸망이후,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마한과 변한의 계음(契飮) 등의 행사로 계승되었으며, 고려와 조선에서도 단군신앙은 쭉 이어졌다. 개천절은 나라의 가장 큰 축제의 날중 하나로 이 날은 다 함께 천신제를 지낸 후,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며 춤을 추고 놀았다고 한다.
예로부터 함경도 지방에서는 음력 10월 3일에 단군 탄생일을 축하하는 ‘향산제(香山祭)’라는 이름의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존재하였는데, 여기서 개천절의 날짜가 기원하였다 한다. 1909년 1월 15일 나철을 중심으로 민족종교인 대종교가 다시 문호를 열자 개천절을 경축일로 제정하고 매년 음력 10월 3일 경축 행사를 거행하였다. 이와 같은 행사는 일제의 압박을 받고 있는 한민족의 민족정신을 기르는데 기여하였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 정부에서는 이때부터 음력 10월 3일을 국경일로 제정하였다. 이는 당시 단군을 한겨레의 시조로, 고조선을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보는 보편화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이어져 1948년 9월 25일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단군기원(檀君紀元), 즉 단기를 국가의 공식 연호로 법제화하였다. 이후 1949년 10월 1일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천절은 원래 음력이므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음력으로 지내왔는데 1949년 문교부가 위촉한 "개천절 음,양력 환용 심의회'" 심의결과 음, 양력 환산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와 "10월 3일"이라는 기록이 소중하다는 의견에 따라 음력을 양력으로 바꾸어 거행하게 되었다.
한편, 민족공교인 대종교 측에서는 "개천의 본래의 뜻이 단군의 건국일이 아니라 환웅(桓雄)이 천신(天神)인 환인(桓因)의 뜻을 받아 처음으로 하늘문을 열고 태백산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와 홍익인간(弘益人間)·이화세계(理化世界)의 대업"을 시작한 BC 2457년(上元 甲子年) 음력 10월 3일을 뜻한다고 보고 있다. 어찌되었던 개천절은 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을 고루고루 사랑한다는 뜻임)과 이화세계(이치로써 다스린 세계를 뜻하며, 재세이화가 충족된 세계를 뜻함)의 정신이 기본인 우리의 국가 경축일이다.
홍익인간, 재세이화는 우리의 기본 정신세계다.
우리는 하늘문이 열릴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개천절은 먹고 마시는 축제의 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환인과 환웅의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살피는 날이어야 한다. 김광규 선생의 시어처럼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하는 근원적 자성을 통하여 이 땅의 모든 것이 굽은 것 없는 지, 바르게 살피고, 바르게 펴서, 똑바로 다시 잡아 민족의 융성과 세계평화는 물론 서로서로가 사랑하는 참된 세상을 만들어 가야한다. 시끌하고 부질없는 여야의 정치적 대립은 국민들을 어렵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며, 갖은 자와 갖지 못한 자의 대립과 불균형 심화는 5,000년 역사와 함께 우리민족이 지켜 내려온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의 정신에 분명 어긋난 행위이고 반 통치행위이다. 모든 것은 이치에 합당하여야 한다.
이세훈 논설위원 / 경제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