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길주 외교부 출입 기자 | 1945년 이후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지탱해 온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수리'가 불가능한 '철거'의 단계에 진입했다는 진단이 나왔다. 2026년 뮌헨 안보 보고서(Munich Security Report)가 제시한 '파괴의 정치(Wrecking-ball Politics)'는 단순한 수사가 아닌, 한반도 안보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실존적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특히 미국이 국제 질서의 설계자에서 스스로 체제를 허무는 '철거 전문가'로 변모함에 따라, 동맹의 가치마저 '거래적 논리'에 매몰되는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재명대통령의 국군의 날 연설 (2025년 10월 1일)
“우리는 갈등이 심화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으며, 각자도생의 상황에 놓여 있다.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을 보장하기 위해 우리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 2026 뮌헨 보고서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연설문을 인용하고 있다.
‘칸트의 삼각형’ 붕괴와 한반도 안보 동맹의 위기
보고서가 지적한 '칸트의 평화의 삼각형(다자주의·자유무역·민주주의)'의 붕괴는 한미 동맹의 근간을 위협하고 있다. 과거 미국은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을 전략적 자산으로 여겼으나, 제2기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국익을 제약하는 족쇄'로 규정했다.
특히 ‘돈로 독트린(Donroe Doctrine)’ 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힘 중심 외교는 한반도에 가혹한 비용 청구서를 내밀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2035년까지 국방비를 GDP 대비 3.5%로 증액해야 하는 압박에 직면해 있다. 이는 단순한 방위비 분담금을 넘어, 미국의 안보 공약이 언제든 '경제적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불확실성을 상징한다. '해방의 날' 관세 도입과 같은 보편적 압박은 한미 경제 안보 동맹에 균열을 내며, 한국 외교를 '거래적 모순'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
‘제르스퇴룽슬루스트(파괴 열망)’와 북한의 전략적 틈새
국제 사회 전반에 확산된 '제르스퇴룽슬루스트(Zerstörungslust, 파괴 열망)' 는 북한에게 새로운 전략적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기존의 국제 규범과 제재 체제에 대한 신뢰가 상실된 틈을 타, 북한은 러시아와의 군사적 밀착을 강화하며 '세력권 정치'의 수혜를 입으려 하고 있다.
보고서가 언급한 '개인주의적 체제(Personalist Regime)' 외교는 북핵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워싱턴의 의사결정이 다자간 합의가 아닌 지도자 간의 '사적 딜'에 의존하게 되면서, 비확산 체제라는 보편적 원칙은 실종되고 '상호 호혜적 파트너'라는 명분 아래 북한의 핵 보유가 기정사실화될 위험이 커졌다. 이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지난 30년의 노력이 '대안 없는 파괴'의 희생양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웨스트리스니스(Westlessness)’와 동북아의 지정학적 격변
뮌헨 안보 지수(MSI)가 보여주는 '무력감(Helplessness)'과 서구 연대의 실종은 동북아에서 중국의 부상을 가속화하고 있다. 미국이 '거래적 모슈'를 보이며 동맹국에 관세 폭탄을 투하하는 사이, 지역 국가들은 미국에 대한 신뢰를 거두고 중국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전략적 헤징(Hedging)'을 강요받고 있다.
일본이 국방비를 GDP 2%로 증액하며 '전쟁 가능한 국가'로 빠르게 탈바꿈하는 현상 역시 이러한 '각자도생'의 일환이다. 한국 또한 미국 주도 질서로의 회귀라는 '향수'에서 벗어나, 안보의 외주화가 끝났음을 직시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한반도 생존 전략
'파괴의 시대'는 과거로의 회귀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폐허 위에서 새로운 질서를 설계해야 하는 한국 외교에 요구되는 전략적 선택은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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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 힘의 요새화: 안보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독자적 방어 역량과 핵심 전략 기술(반도체, AI 등)에 대한 '물질적 힘'의 투자를 극대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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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층적 리더십 연합 구축: 미·중 양자택일의 구도를 넘어, 가치를 공유하는 '정예 연합(Minilateralism)'을 통해 정책 실행력을 확보하고 외교적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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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를 넘어선 규범의 재건: 미국의 파괴적 행보 속에서도 국제 규범이 시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신뢰할 수 있는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과거에 대한 향수는 전략이 될 수 없다"는 마크 카니의 지적처럼, 대한민국은 이제 무너진 질서의 파편 위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대담한 건설자(Bold Builders)'가 되어야 한다. 파괴의 시대를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그 파괴를 딛고 더 강인한 체제를 스스로 건설하는 것 뿐일 것이다.
외신과 글로벌 싱크탱크들은 현재 한반도를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해체 이후 가장 급격한 지정학적 전환을 겪고 있는 핵심 지역으로 지목하고 있다.
- 《뉴욕타임스(NY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은 미국의 ‘2025 국가 안보 전략(NSS)’을 인용하며, 워싱턴이 안보 보장을 담보로 동맹국에 가혹한 경제적 양보를 요구하는 ‘거래적 외교’를 본격화했다고 보도했다. 특히 한국 등 아시아 우방국에 대해 보편적 관세 부과와 방산 제품 구매 강요 등 안보와 경제를 결합한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 《NHK 월드》와 《AP 통신》은 한국 정부가 현재 GDP 대비 2.3% 수준인 국방 예산을 2035년까지 3.5%로 파격 증액하기로 한 결정을 비중 있게 다뤘다.
- 《더 이코노미스트》는 인도-태평양 지역이 미국의 후퇴와 중국의 부상 사이에서 ‘안보 공백의 늪’에 빠졌다고 경고했다.
- 《채텀하우스》는 미국 행정부가 국제법보다 ‘지도자 간의 사적 거래’를 중시하는 경향(Personalist Regime)을 보이면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보편적 규범이 실종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26 뮌헨 안보 보고서의 결론은 명확하다.
“과거 질서에 대한 향수는 전략이 될 수 없다.”
세계 질서가 힘과 거래가 지배하는 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한국 외교 역시 안보의 외주화 시대가 끝났음을 직시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독자적 물질 역량을 강화하는 동시에, 가치를 공유하는 정예 연합을 통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대담한 건설자’가 되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