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존영 기자 | 정문부鄭文孚, 1565년 3월 20일(음력 2월 19일)~1624년 12월 28일(음력 11월 19일))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란 일등 공신 우찬성 대제학 의병장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승전 기념비로는 북관대첩비가 있다.

정문부(1565~1624)장군의 묘역은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에 있으며, 이곳에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충덕사도 함께 있으며,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정문부 장군은 1565년 한성부에서 부사 정신鄭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정언각鄭彦慤이며, 할머니는 이조판서 신공제申公濟의 셋째 딸이다.
1585년(선조 18년) 생원이 되었고, 1588년선조 21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1589년 한성부 참군이 되었다. 그 후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고, 1591년 함경북도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북쪽의 여진을 순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회령의 국경인이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기고 항복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임진왜란 초기, 정문부는 적이 쏜 총에 맞은 총상으로 도망쳐 부령에서 거지처럼 돌아 다니다 이름을 바꾸고 용성의 어느 무당의 집 하인이 되었다고 한다. 경성鏡城 사람 이붕수李鵬壽가 의병義兵을 일으켰을 때, 의병에 가담한 경성의 유생 지달원池達源이 정문부의 소식을 듣고 정문부를 찾아가 함께 싸울 것을 청했는데, 처음에 정문부는 지달원의 말을 믿지 않고 난색을 보이다 마침내 허락하였고, 남촌에 이르러 장사들을 불러모으자 강문우姜文佑 등과 함께 2백여 명의 군사를 모았으며, 앞서 도망쳐 산에 숨었던 경성부사 정현룡과 경원부사 오응태도 산중에서 나왔다.
의병의 지휘부는 정문부를 의병의 대장으로 추대하고 정현룡과 오응태는 차장으로 하였다. 『북관대첩비』에는 때마침 북방의 야인들이 북변을 침범한 일이 있어, 정문부가 사람을 시켜 국세필에게 이들을 방어할 것을 제의했고 국세필이 허락하여 의병을 종성 성안으로 맞아들였는데, 이튿날 아침에 정문부가 남쪽 성루에 올라가서 국세필을 유인한 다음 강문우를 시켜 생포해서 처형한 뒤, 즉시 군사를 인솔하여 남쪽 명천으로 가서 말수 등을 잡아 죽였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28세 의병장으로 현격한 공을 세운 충의공 정문부 장군과 그의 활약상을 기록한 북관대첩비를 주제로 지난 2월 국회에서 기획전시회가 열렸다.
재단법인 북관대첩비민족운동중앙회는 지난 2월 3.1절을 앞둔 2월 21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3층 제3홀 중앙전시관에서 '청년의병장 정문부, 북관대첩비로 대한민국의 길을 말하다' 기획전에는 북한사회에 관심이 많은 세계적 3대 투자자 짐 로저스 회장도 참석했다.

전시 관계자는 "짐 로저스 회장이 북관대첩비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고, 이번 전시가 남북 관계의 새로운 구축의 장이 될 것이라고 그 의미를 밝혔다"고 말했다.
충의공 농포(호) 정문부 장군은 조선 임진왜란 당시 28세로 의병장이 되어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의 왜구를 멸절시킨 불패의 명장이다. 그는 덕장으로 백성의 추대로 의병장이 됐다. 간신의 모함에 역적으로 몰려 고문사를 당한 비극의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건립한 북관대첩비는 러일전쟁 당시 일제가 한민족 정기를 말살하겠다고 강탈해 갔고, 야스쿠니 신사 구석에 방치하고 100년 동안이나 북관대첩비 머리에 1톤의 돌로 눌러 짓이겨놓은 비운의 비석이다. 남북한의 공조로 일본에서 되찾아온 유일한 문화재로 남북화합의 상징물이자, 역사문화재이기도 하다.

북관대첩비는 현재 함경도 김책시 림명리에 2만평의 성지를 조성해 북한의 국보 193호로 지정해 보호를 받고 있다. 복제비는 현재 경복궁 국립고궁박문관 옆에 초라하게 세워져 있다.
지난 2월 국회 기획전은 정문부 의병대가 활약한 1592년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의 기록물을 시작으로 1709년 북관대첩비 건립, 1905년 일본군 제2 예비사단 여단장 소장 이케다 쇼스케가 주민들을 협박해 강탈해 간 역사적 사실과 관련한 자료, 머리에 1톤의 돌을 얹고 100년 동안이나 방치했던 야스쿠니 신사의 자료와 대첩비를 환수하기 위해 노력했던 독립운동가 조소앙의 발표문 등이 공개되기도 했었다.
북관대첩비는 2005년 남북 공조로 일본에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유일한 문화재이기에, 고국의 품에 안길 때까지의 약 400여 년 역사적 스토리텔링이 다양한 사진을 소개했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북관대첩비는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93호로 지정
정문부鄭文符의병장이 왜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숙종 34년(1707년)
길주군에 세워진 것으로 1905년 러·일 전쟁 중 일제에 의해 약탈돼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돼 왔음.
비석의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
북관대첩비환국일정
2003년 초산스님과 일본의 카끼누마센신 일·한불교복지협회 스님과 반환 협의
2005년(재)법왕청평화재단 이사장 담화 이존영 산하의 한일불교복지협회(설립)
총 회장 초산 엄태종스님과 북관대첩비민족운동중앙회 원민식 상임의장이 민간 주도함.
2005년 3월 28일 중국 베이징 평양관에서 남·북 합의서 작성
2005년 10월 12일 한·일 양국 북관대첩비 인도문에 서명
2005년 10월 20일 북관대첩비 한국으로 반환됨.
2006년 2월 13일 북으로 인도를 하기 위한 남·북 합의서 작성
조선불교도연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심상진
한일불교복지협회장 초산 스님, 북관대첩비민족운동중앙회 원민식 의장
2006년 3월 1일 북관대첩비 북한 개성 성균관에서 인도 인수식
2006년 3월 23일 북관대첩비는 오랜 세월 끝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감.
현재 복제비는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독립기념관, 의정부의 정문부장군묘역에 세워져 있음.
공익 재단법인 북관대첩비민족운동중앙회
총 회장 초산 큰스님
상임의장 원민식 박사
이사장 담화총사 이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