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나라(奈良) 정상회담이 보여준 실용외교의 구조화

- 셔틀외교의 정착
- 고도(古都) 외교의 힘

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길주 외교부 출입 기자 |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나라 정상회담은 단순한 양자 외교 일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번 회담은 한일 관계가 ‘관리 국면’을 넘어 제도화·구조화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불과 3개월 사이 세 차례 정상 간 만남이 성사된 점, 그리고 단독·확대 회담을 넘어 추가 환담과 만찬, 문화 일정, 역사 유적 공동 방문까지 이어진 입체적 일정은 한일 정상 외교가 일회성 이벤트를 벗어나 상시 작동하는 외교 메커니즘으로 정착했음을 분명히 한다.

 

 

이번 나라 회담은 지난해 8월 대통령의 방일로 재개된 한일 정상 셔틀외교가 완전히 정상궤도에 올랐음을 공식 확인한 자리였다. 작년 10월 APEC 계기 방한, 11월 G20 회동에 이은 세 번째 정상회담은 빈도 자체가 메시지였다.

이는 과거 한일 관계에서 흔히 반복되던 ‘정상 간 만남 → 정치 환경 변화 → 외교 중단’이라는 불안정한 패턴과 명확히 결별했음을 의미한다. 

 

다카이치 총리가 나라에 먼저 도착해 대통령 숙소 앞에서 직접 영접한 장면은 일본 외교 관행상 이례적 수준의 예우로 받아들여진다. 추가 환담 요청, 문화 교류 프로그램(K-팝 드럼 합주), 그리고 다음 날 일정까지 동행한 점은 일본이 한국과의 관계를 의전 이상의 정치적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연주복 제공과 공식 사진 촬영은 단순한 친교를 넘어, 국내외를 향한 관계 복원 메시지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이번 회담의 가장 중요한 외교적 장치는 장소였다.
경주와 나라—양국의 고도에서 연쇄적으로 정상회담을 개최한 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고전적 외교 언어를 현실 정치에 구현한 사례다.

호류지 공동 방문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호류지는 1,500년 이상 이어진 고대 한반도와 일본 간 교류, 특히 백제 문화의 흔적이 응축된 공간이다. 일본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이곳을 정상 외교의 무대로 선택한 것은 갈등의 역사 대신 공유된 기원의 기억을 소환한 고도의 상징외교로 해석된다.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수장고를 개방해 금당벽화 원본을 공개한 조치는 일본 외교에서 최상급 신뢰의 표시로 평가된다.

 

이번 회담에서 주목할 대목은 과거사 현안의 다뤄진 방식이다.
1942년 야마구치현 우베시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유해 문제를 두고, 다카이치 총리가 단독 회담에서 첫 번째 현안으로 직접 제기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과거사 문제를 외교적 부담이나 방어 논리가 아닌, 인권·인도주의라는 보편 가치의 영역으로 옮겨놓으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국내외 언론은 이를 “과거사 해결의 새로운 접근 모델”로 평가하고 있다.

 

이번 회담이 남긴 가장 큰 성과는, 한일 관계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구조적 단계로 진입했다는 점이다. 이는 향후 어떤 정치 환경 변화 속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외교적 토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