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존영 기자 | 옛사람들은 까마귀가 자라서 늙은 부모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모습을 보고 이를 반포지효反哺之孝라 이름 붙였다.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갚는 것이 이치라는 뜻이다.

자연의 짐승도 아는 도리를 인간이 어찌 모를까, 효는 도덕을 넘어 생명의 본성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이 자연의 순리조차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고령화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 경제적 압박은 세대 모두를 짓누르며 효孝는 덕목이라기보다 숙제처럼 여겨진다. 부모를 모시면 희생, 요양을 맡기면 죄책감, 돌봄을 포기하면 비난. 어느 선택에도 상처만 남는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식들이 짊어져야 하는 짐은 점점 더 무겁고 고립되어 간다. 효도는 마음이 아니라 제도가 막고, 경제가 가로막고,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형국이다.

나를 키운 세대는 늙어가지만, 그들을 돌볼 시간은 사라졌다. 부모 세대는 평생 자식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며 살아왔다. 그런데 정작 자식 세대는 그 은혜를 돌려드리고 싶어도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다.
과로사회, 높은 주거비, 불안한 일자리, 평생 빚을 갚으며 살아가는 구조 속에서 자식의 마음은 늘 미안함에 젖어 있지만 손은 부모에게 닿지 못한다. 효도를 못해서가 아니라, 효도할 여유를 빼앗긴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외로움은 사회의 실패를 보여주고 있다. 요양병원에 홀로 누워 있는 노인들의 눈빛, 수년째 자식의 전화 한 통 오지 않는다는 푸념, 설·추석에도 빈자리로 남는 어르신들의 식탁. 이것은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구조적 문제다. 부모의 노후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면 이 땅에 반포지효는 다시 자리 잡기 어렵다. 효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안전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효孝는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아니라 ‘세대를 잇는 사랑’이다 반포지효는 단순히 물질적 돌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안에 담긴 본질은 세대 간에 흘러가는 사랑이다. 자식이 부모를 돌보듯, 또 그 자식이 성장하면 다시 다음 세대를 감싸는 것. 이 순환이 멈출 때 사회는 갈라지고, 세대는 싸우고, 가정은 흩어진다. 효는 과거의 도덕이 아니라 미래를 지탱하는 유일한 다리다.
반포지효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받은 사랑을 당신은 어떻게 다음 세대로 되돌려 주고 있는가?” 효는 완벽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미안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 작은 전화 한 통, 자리를 함께하는 시간, 돌봄에 대한 사회적 연대에서 다시 시작된다.
부모가 혼자 늙어가지 않는 사회, 자식이 미안함에 눌리지 않는 사회, 세대가 서로에게 따뜻한 사회, 그런 세상이야말로 반포지효가 다시 깃드는 나라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