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저널 (Diplomacy Journal) 이정하 기자 | 모든 국가의 역사에는 점진적인 개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국가 전체의 제도를 새롭게 정비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오늘날 카자흐스탄이 바로 그러한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새 헌법 초안은 단순한 일부 조항의 수정이 아니라 국가 제도 전반의 체계적 현대화를 목표로 한다. 이는 카자흐스탄이 독립 초기의 국가 형성 단계를 넘어 제도적 성숙과 안정, 그리고 균형 잡힌 발전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변화로 평가된다.
카자흐스탄의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은 2026년 2월 11일 새 헌법 채택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전국 국민투표를 2026년 3월 15일 실시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국민투표에서 헌법 개정안이 지지를 받을 경우, 개혁은 2026년 7월 1일부터 본격적인 정치적 전환에 들어가게 된다. 이 과정에는 현 국회의 임기 종료와 새로운 제도적 체계의 출범이 포함되며, 헌법적 권력이 국민의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새 헌법 초안은 광범위한 사회적 논의와 공론화 과정을 통해 마련되었다. 카자흐스탄 전 지역과 다양한 사회 계층을 대표하는 130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헌법위원회에는 법률 전문가, 국회의원, 시민사회 대표, 학계 인사, 정부 관계자들이 참여했다. 위원회는 현행 헌법의 약 84%에 해당하는 77개 조항에 대한 개정 제안을 검토했으며, 논의 끝에 전면적인 새로운 헌법 문안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헌법 초안은 총 12차례의 공식 회의와 6개월에 걸친 의회 개혁 검토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또한 국가 전자 포털 eGov와 e-Otinish를 통해 시민과 전문가들이 제출한 의견도 반영되었다. 전국적인 공론화 과정에서는 약 1만 건의 제안과 권고가 접수되어 면밀히 검토됐다.
최종 헌법 초안은 11개 장, 96개 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헌법위원회 및 헌법재판소 위원장인 엘비라 아지모바가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국민투표에 앞서 헌법 초안 전문이 공개됨으로써 국민들이 내용을 직접 검토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는 개혁 과정의 개방성과 참여성을 높이는 조치로 평가된다.
이번 헌법 개혁은 정치 체제의 구조적 변화를 포함한다. 기존의 초대통령제적 통치 모델에서 보다 균형 잡힌 대통령 중심 공화국 체제로 전환하면서 의회의 권한과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새 헌법 초안은 145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단원제 의회 ‘쿠룰타이(Kurultai)’의 도입을 제안한다. 의원들은 비례대표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다. 쿠룰타이는 정부에 대한 불신임 결의권과 장관 활동에 대한 강화된 감독 권한을 갖게 되어 권력 간 견제와 균형을 강화하게 된다.
또한 대통령 중심 체제는 유지되지만 제도적 균형을 위한 새로운 장치들이 도입된다. 부통령, 총리, 헌법재판소 재판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최고감사원 위원 등 주요 헌법 기관의 인사는 의회의 승인을 통해 임명되도록 규정되어 권력 기관 간 공동 책임과 투명성이 강화된다.
헌법 초안에는 부통령 제도도 새롭게 도입된다. 이는 대통령 임기가 조기에 종료될 경우 국가 운영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다. 헌법상 권력 승계 순서는 부통령 → 쿠룰타이 의장 → 총리 순으로 명확히 규정된다.
헌법재판소의 독립성과 권한도 강화된다. 시민들은 헌법재판소에 직접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며, 헌법적 권리 보호 체계가 한층 확대된다. 또한 공정한 재판 원칙, 무죄 추정, 이중 처벌 금지, 위법한 증거 사용 금지 등 기본적인 법적 보호 장치가 헌법 차원에서 강화된다.
디지털 시대의 변화도 헌법에 반영됐다. 개인정보 보호, 은행 비밀, 전자 통신 보호가 헌법적 권리로 규정되며, 국가 기관의 위법 행위로 피해가 발생할 경우 보상을 받을 권리 역시 명시된다.
시민 참여 확대를 위한 제도적 장치도 포함됐다. 새 헌법은 ‘카자흐스탄 국민회의(People’s Council of Kazakhstan)’라는 전국적 자문 기구를 통해 국민의 정책 참여를 확대한다. 이 기구는 의회에 법률안을 제출하거나 국민투표를 제안할 수 있으며 국가 정책에 대한 권고를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헌법은 또한 지속 가능한 발전 원칙을 규정하고 환경 보호와 자연 보존에 대한 시민의 책임을 강조한다. 동시에 지역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특별 경제 제도의 법적 기반을 마련하여 투자자들에게 예측 가능성과 투명성을 제공하도록 했다.
새 헌법은 인권과 자유를 국가의 최우선 가치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으며, 주권과 영토 보전, 국민 통합, 민족 간 화합을 국가의 근본 원칙으로 재확인하고 있다. 교육, 과학, 문화, 혁신 역시 국가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규정되며 역사·문화 유산의 보존도 헌법 차원에서 보장된다.
국가의 세속적 성격 또한 명확히 재확인된다. 이는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헌법 질서와 공공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종교와 국가 제도의 분리를 명확히 하는 원칙을 포함한다.
새 헌법은 헌법재판소의 사전 심사를 거친 뒤 국민투표를 통해서만 채택된다. 헌법 채택일은 국가 공휴일로 지정될 예정이며, 이는 헌법 개혁의 역사적 의미를 상징하게 된다.
카자흐스탄이 추진하는 이번 헌법 개혁은 단순한 법률 개정이 아니라 제도적 안정성과 법치주의, 그리고 시민 참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국가 발전 모델을 구축하려는 시도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도 이는 법치주의 강화와 제도적 예측 가능성 확대, 그리고 장기적 협력 환경 조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새로운 헌법은 카자흐스탄의 미래를 위한 전략적 투자이자 현대적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